이태리 파리 스위스 여행
여행 짐을 꾸릴 때와 풀 때는 전혀 다른 마음입니다. 꾸릴 때는 설레는 마음 하나이지만 풀 때는 여러 마음으로 풀게 됩니다. 안도, 뿌듯함, 아스라함, 아픔, 그리움. 그래서 마음이 잘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여럿이 함께 있을 때는 말이 많아지고, 혼자 있는 시간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선 낯설었던 곳을 여전히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짐을 꾸릴 때 넣었던 칫솔은 칫솔일 뿐이었지만 풀 때의 칫솔은 전혀 다릅니다. 칫솔모를 엄지로 쓸어보노라면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감촉에서 이국의 바람과 포도 위를 뒹굴던 상제리제 거리의 낙엽이 떠오릅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던 가을의 정서가 진하게 느껴집니다. 여행용 캐리어 바퀴의 흙먼지를 닦노라면 돌로 포장된 로마의 아피아가도를 구르던 제국의 전차 바퀴 소리가 그제사 들려옵니다. 하루마다 늘어나던 세탁물. 풍겨 나는 구린 냄새에서 유럽의 치즈를 떠올린다면 이상취향일까요. 여행 짐을 풀 때에만 맛볼 수 있는 발효성 강한 정서입니다. 발효란 곰삭는다는 것이고 곰삭는다는 것은 시간을 요합니다. 여행하면서 본 것을 가슴 항아리에 담아 두고두고 되뇌며 생각하며 발효시켜 나가는 것이 여행의 참맛입니다. 여행을 요리에 비한다면 짐을 꾸리는 것이 애피타이저요 여행을 하는 것이 메인 요리이겠지만, 소화시키고 힘을 얻는 것은 짐을 풀면서 비로소 시작되는 일입니다.
시차로 인한 불면현상은 이번에는 꽤 오래갈 것 같습니다. 중세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오르비에토에서 이태리 여행을 차분하게 마감했습니다. 로마에서 인천까지 지구 반바퀴를 돌아 날아왔습니다. 날짜는 하루가 늘어있고 시간은 8시간이 앞당겨져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이틀이 지나도록 오르비에토 중세풍의 골목길 풍경과 '현대인'을 낯설어하는 듯한 주민들의 눈길 그리고 검은빛 돌담과 덩굴식물로 덮인 정원을 가진 식당에서 '중세인'이 된 채 먹은 음식들이 마치 조금 전 일인 것처럼 생생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광속의 우주비행을 하고 지구로 돌아오면 지구인들이 나보다 훨씬 늙어있다는 가설이 과학적인 이해가 아니라 느낌으로 훅~ 다가옵니다. 여행으로 겪는 불면현상은 시차 때문이라지만 더 큰 이유는 이국적인 현상들을 접하고 난 뒤에 일어나는 각성효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각성효과가 클수록 불면현상도 클 것입니다.
담뿍 안겨버리고 싶은 여행지는 사람을 환각에 빠뜨리는 마법을 갖습니다. 낯선 곳에서는 내 마음마저도 낯설어집니다. 가슴이 촉촉해지고 눈길은 우수에 젖습니다. 영화 <Before Sunrise>의 제시와 셀린이 그러했고,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에서 로버트가 그러했습니다. 기약도 없이 헤어지는 우수에 젖은 눈빛만큼 매력적인 것도 없습니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분수에 던지면 로마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지요. 동전이 내 마음인가 봅니다. 마음을 그곳에 두고 몸만 돌아옴이 힘든 자들의 염원이 분수 안에 가득합니다. 수필가 피천득선생님은 그의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의 세 번째 만남은 차라리 하지 않았어야 할 일이라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첫 만남과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로맨스 없는 로맨스는 늘 감질나게 합니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음식을 먹은 듯 아쉬움이 한가득입니다. 여행이란 바로 이런 건가 봅니다.
현지 셀파와 히말라야산을 오르는 등반대는 현지 셀파들에게 "치타 치타(빨리 와 빨리 와)"하며 재촉하지만 셀파들은 "비스타리 비스타리(천천히 천천히)"로 답합니다. 함께 가야 할 영혼이 아직 따라오지 않았으니 영혼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라는 현실 그리고 여행은 '치타'와 '비스타리'를 주고받으며 늘 줄다리기를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는 어느 시인의 시처럼 이승에서의 삶이 소풍이 되려면 여행을 다녀와 아득하고 그리운 마음으로 짐을 푸는 일이 잦아야 하거늘. 무엇보다도 또 떠나고 싶은 마음 하나면 그 여행이 아름다웠다는 증거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