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왜 살까 싶을 때가 더러 있긴 합니다. 누구나 그럴 겁니다. 사람 수만큼 이유도 많습니다. 실패와 좌절이 가장 큰 이유일 것 같습니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서 희망은 왜 맨 밑에 있었을까요. 희망이 먼저 나오면 금세 기운을 차리고 재도전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을 텐데요. 실패와 좌절의 순간에 우울에 빠지기가 쉽지 희망에 차서 힘을 내기가 어려운 인간의 마음이 신화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울, 비관으로 열등감에 빠지게 되면 절망에 빠져 단절과 도피의 방어기제가 나타나고 심지어는 난폭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좌절과 서러움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 아들을 내보낸 노모가 노쇠한 몸으로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들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하 수백 미터 갱도에 빛 한줄기 물 한 방울도 없이 고립되었던 광부들도 구조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수십일만에 다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가렛 미첼의 명작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마음속의 연인 애슐리 윌크스와도 남편 레트 버틀러와도 진정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스칼렛 오하라는 텅 빈 도시에서 고향의 타라 농장으로 돌아가겠다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절규합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마음의 판도라 상자 안에 갇혀있는 희망을 불러내어 우울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사람도 있지만 절망에 빠져 끝내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희망은 문지르기만 나타나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요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 힘을 다해 구해야 주어지는 것이고 미친 듯이 두드려야 겨우 열리는 게 희망의 문입니다.
희망을 불러내는데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육중한 차체를 움직이려면 자동차 엔진에 시동을 걸어야 하고 시동을 걸려면 전기적인 작은 힘이 필요합니다. 작은 힘이 결국 육중한 차체를 움직이게 하듯이 희망은 우리가 우울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놀라운 효력을 갖고 있습니다. 희망의 불씨가 사그라지면 절망입니다. 절단(切斷)된 희망이 절망입니다. 희망이 가녀린 불씨라면 그 불씨에 입김을 불든 부채질 하든 희망을 소망할 작은 힘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희망의 집은 마음입니다. 허심포산(虛心抱山)이라는 말은 마음을 비우면 산도 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산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집은 넓고 넓어서 그 안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시기 질투 복수심 낙망 절망 우울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보(뽀)가 고약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바로 판도라상자였습니다. 마음은 속에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속마음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옆에 있던 그 사람, 그에 대한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을 마음에 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신비에 싸인 속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늘 불안하고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 모릅니다. 그 마음속에 든 것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 연애입니다. 연인의 마음에 든 것이 오직 자신 뿐이라는 걸 확신하면 엄청난 행복감과 동기부여를 받게 됩니다. 세상을 다 얻었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밝혀진 바로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부린 요술이라고 합니다만 사랑의 확신이 도파민 분비를 촉진한 것입니다. '날아오른다'는 감정이 거짓이 아닙니다. 반대로 만일 연인의 마음에 든 내가 초라하거나 더 나아가 그 마음에 내가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순간 죽음도 불사할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실연의 아픔입니다.
'마음이 우울한 날에는 마음을 헹군다'는 시구(詩句)가 많습니다. 하얀색의 희망이 부정적인 감정들로 가득 차 마음이 검은색으로 변해버렸으니 맑은 물에 헹구어내겠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빗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구리거울 앞에 앉아 참빗으로 헝클어진 머릿결을 쓸어내려 쪽을 지는 요조한 여인의 머리처럼 마음에도 빗질을 하면 번뇌로 끓던 마음이 요조해질 것이라는 소망이 담긴 말입니다. 고요한 마음은 봄바람에 누웠다가 일어나는 초원 같지만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은 백척간두에 선 것 같고 격랑의 바다같습니다. '수身제가치국평천하'는 '수心제가치국평천하'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 한 몸을 다스리고 닦는 것은 마음을 다스림으로 시작해서 평정심의 경지에 이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요술심술변덕도 부리고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되게 하는 마음은 우리 몸 중에 도대체 어디에 들어 있는 걸까요. 십중팔구는 가슴이라고 합니다. 화가 나면 가슴에 불이나고 사랑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고백이 받아들여지면 가슴이 벅차고 놀라면 가슴이 쪼그라들고 슬프면 가슴이 아픕니다. 'heart'는 심장이며 가슴이며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슴 부위에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메타포만큼 다양한 것도 없습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내 마음은 낙엽이오. 잠시 그대의 뜰에 와서 머무르게 하오.' 내 마음은 태양이오 그댈 위해 영원히 불타오를 것이오. 내 마음은 바다요 그대 내 품에 뛰어드오. 내 마음은 냉장고요 그대 모습 변함없이 지킬 것이오. 내 마음은 라면이오 긴긴 겨울밤 출출한 그댈 위해 한달음에 달려 가오리. 마음은 어떤 은유도 다 받아들입니다. 마음은 넓고 높고 깊고 아득하고 청경지수처럼 맑고 안갯속처럼 오리무중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노벨상 수상작가 노신은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희망을 품으면 희망의 길이 생기듯이 마음이 자꾸자꾸 닿는 곳에는 내 마음을 끄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마음의 길이 가능하다면 마음과 마음 사이의 길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길입니다. 공감과 소통의 길이요, 사랑의 길이요, 영적 철학의 길입니다.
반대로 '내 마음 둘 데가 없다'는 말은 마음의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은 외로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마음 둘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외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이야기가 나옵니다, 성 중에 타락하지 않은 '의인' 한 명만 있어도 성을 불사르지 않겠다는 하나님께서도 '단 한 명 의인'이 없어서 불로 진노의 벌을 내리셨습니다. '단 한 명의 결핍'이 각종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고 노숙자를 만들어내고 고독사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잉여라는 말은 '남아돈다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물건이 남아돈다면 더 많이 사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잉여인간'이라는 무지막지한 표현을 합니다. 마음 둘 데가 없거나 내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AI(인공지능)의 발달 속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신하는 기계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면 마음 둘 데가 없는 '잉여인간의 범람시대'가 올 게 분명합니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뭘 하고 살아야 할지를 AI에게 물어봐야 하는 건가요?
'마음대로' 한다? 뇌가 판단하고 뇌가 내린 판단에 따른 명령대로 움직이는 게 분명 한대도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고 말합니다. 이건 분명히 뇌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요, 섭정입니다. 그러면서 나쁜 것은 마음에게로 미루어 버리는 약아빠진 면도 있습니다. 제멋대로 한 것은 뇌인데 자신은 책임을 면하고 '마음대로'했다며 마음에게 책임을 다 뒤집어 씌웁니다. 뇌에 대한 예우가 지극합니다. 머리는 골치만 아프면 되지만 마음은 슬픔 설움 외로움도 다 견뎌야 합니다. 머리가 서럽다, 머리가 외롭단 말은 없습니다. 마음이 슬프고 마음이 외롭고 마음이 서럽습니다.
희망은 '마음 둘 곳'이라는 결론을 내려봅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많은 나라는 마음 가는 곳이 많아서 여기저기서 으쌰으싸~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나라입니다. 마음 둘 곳이 없어서 퀭한 두 눈으로 아무런 감흥 없이 연말연시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마음을 잘 다스려 희망을 가득채워 새해를 맞이하기를 소망합니다.
바야흐로 연말입니다. 성탄절은 코앞이고 새해도 모퉁이에 와 있습니다.
I wish you a Merry Christmas.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