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르는강물처럼 Dec 11. 2024

'개와 늑대의 시간'에 서서

겨울 만감(萬感)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청소년기에 겪고 넘는 사춘기가 있습니다. 몸에 찾아온 봄입니다. 마음도 같이 큰 변화를 겪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사춘기를 몹시 빠르게 부는 바람과 큰 물결이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몸이 성숙하여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는 때에 이르렀으나 마음이 아직 덜 자라서 미성년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니 그 굴레를 벗어버리려고 돌풍처럼 성난 파도처럼 몸부림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몽룡과 성춘향은 꽃다운 이팔청춘에 불이 붙었고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랬습니다.


중년이 지나면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로 갱년기를 겪습니다. 어느덧 몸에 가을이 찾아온 것입니다. 특히, 여자의 경우 갱년기에 들어서면 몸에서 시작되어 마음에도 아주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 두 종류라던 인간 분류에 갱년기 여성을 더하여 세 종류로 분류해 주기를 바라는 여성들이 많을 정도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격한 변화에 '내가 내인가' 의심이 들 정도라고 합니다. 여성만큼은 아니지만 남성 역시 갱년기를 겪기는 매일반입니다. 몸의 변화에 따라 받는 정신적 충격도 매우 큽니다.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는 데는 큰 힘이 듭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만은 청춘이면 좋겠으나 여필종부 하는 정숙한 여인처럼 마음도 몸을 따르려 합니다.


경계지역은 위험한 곳입니다. 집에는 울타리를 치고 나라에는 국경의 벽이 있습니다. 집 울타리에는 벽돌담을 쌓기도 하고 심지어는 감전시키기 위한 전기 울타리를 치기도 합니다. 나라의 경계에는 두 나라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완충지대를 설정하기도 합니다. 경계지역은 분쟁의 씨앗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여행을 마치고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우주선은 극심한 공기저항을 받게 되고 뜨거운 유리는 찬물에 들어가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맙니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면 문화충격을 겪게 됩니다.


사춘기라는 입구에 들어서서 자연이 준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다가 갱년기라는 출구를 나서면 저 멀리가 아니라 서있는 곳이 붉은 노을입니다. 황혼(黃昏)의 시기입니다. 가을에 나뭇잎에 붉은 단풍이 들고, 하루 중 저녁에 노을이 붉게  물든다는 사실이 사뭇 흥미롭습니다. 과학적 해석을 빌자면, 한낮의 태양이 지평선에 가까워지면 햇빛이 대기권을 통과하는 경로가 길어지고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 중에 파장이 짧은 파란빛은 산란해 버리고 구름이 스크린이 되어 붉은빛이 남아서 노을이 붉게 탑니다. 무릇 모든 생명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태양이 지평선 흙에 가까워져 햇빛이 소멸하는 시간, 사람이 살아온 세월만큼 빛이 길어지는 시간, 붉은 단풍처럼 마지막 촛불처럼 사람의 황혼도 붉게 탑니다.


황(黃)은 낮의 빛이고 혼(昏)은 밤의 어두움입니다. 황혼은 낮과 밤의 경계시간입니다. 영어 단어 twilight는 두 개의(twi) 빛이(light), 햇빛과 달빛이 서로 만나는 변방의 시간입니다. 갱년기를 지나 황혼기를 맞으면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면서 남은 생을 어떻게 마감할지 생각하는 시기가 됩니다.


연중 가장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시기를 춘궁기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굶주림으로 죽기까지 했습니다. 춘궁기를 지나는 현실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만 '보릿고개'는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입니다. 황혼을 뜻하는 외국말 중에도 이런 류의 아름다운 표현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黄昏을 'こうこん(kōkon, 코-콘)'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거기 누구시오(彼かれ誰たそ)'라는 뜻을 가진 'たそがれ(타소가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스름 저녁에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밤의 악한 기운을 띤 사람일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 누구인지를 묻는 시간이 황혼입니다. 프랑스어로는 황혼을 'L'heure entre chien et loup(개와 늑대의 시간)'라고 합니다. 어스름한 황혼녁에 실루엣이 되어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반갑게 달려오는 나의 개일까 아니면 나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늑대일까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분간은 어려워도 뭔가가 자신에게로 달려오고 있음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가축 중에 개만큼 충성스러운 동물도 없습니다. 견마지로(犬馬之勞)의 충성 후에도 '개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짐승입니다. 개 선조들의 노고로 오늘날 인간들에게서 '반려'의 지위까지 얻었을 정도입니다. 사람이 황혼기에 들면 또 다른 의미의 '개와 늑대의 시간'을 맞게 됩니다. 푸르던 시절에 자신의 활동 영역에서 개를 길렀는지 늑대를 길렀는지 그 '피드백(feedback)'을 받는 시간입니다.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와 반대로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닫았던 것은 열고 열었던 것은 닫아야 합니다. 바로 '지갑과 입'입니다. 자신의 황혼이 황금빛 찬란한 시간이 되느냐 마느냐의 열쇠가 됩니다. 잘 나가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속에 살면서 지금이 그때인지 아닌지 분간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색하면서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꼰대'가 됩니다.


독일의 게슈탈트(Gestalt 형태) 심리학은 사물들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사물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 전경(前景)이 배경(背景)이 되기도 하고 또 배경이었던 것이 전경이 되기도 합니다. 꼰대는 전경이었던 자신이 배경으로 물러나기를 거부할 때 얻게 되는 '사회적 지위'입니다. 젊고 아름다운 미남 미녀 배우가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가 중년의 나이가 되면 로맨스 주인공의 부모 역할을 하고 더 나이가 들면 할아버지 할머니 역할을 맡게 됩니다. 60대 나이가 되어서도 주인공이 되려 한다면 외면당하는 배우가 될 것입니다. 미인의 얼굴에서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나누어보면 크게 예쁜 곳이 없어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얼굴로 보면 기가 막히게 아름답습니다. 반대로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어느 한 군데 나무랄 데 없는데 크게 끌림이 없는 얼굴이 있습니다. 텍스트는 정언적인 뜻을 갖는 게 아니라 콘텍스트 속에서 비로소 제뜻이 살아납니다. 나이가 들면서 얻은 그윽한 미소와 멋진 주름살이 빛을 발하게 되는 시기가 황혼기입니다. 꼰대가 되면 분노하면서 자신을 핍박하면서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억지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게 비극입니다.


권력을 크게 가졌던 사람일수록 '개와 늑대의 시간'은 두려운 시간입니다. 정치인들 중에는 이 시간이 두려워 자신의 편만 만들어놓으려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대 유다왕국의 왕 솔로몬의 명재판이 떠오릅니다. "아기를 칼로 반으로 잘라 두 여인에게 반씩 주어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아이의 생모(生母)는 아이의 목숨을 살리려고 자신의 아이를 아이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가짜 어머니에게 양보합니다. 정치인에게 국가는 솔로몬 재판정에 선 생모와 같아야 합니다. 국가의 번영을 위해 자신의 이익과 권력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초의 흑인 대통령 만델라가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아기의 생모였기 때문입니다. 흑인을 인종차별로 핍박한 백인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대통령이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생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특기는 자신을 비난하는 상대 정치인에게 거울로 반사하듯 그 비난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뛰어난 재주입니다. '과거에 그대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라고 말하는, 이를테면 '보복'입니다. 보복을 일삼다가 물러난 권력자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잘 살아서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을 여유롭게 맞을 것임을 자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동년배들과 함께 아름다운 황혼을 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반성과 준비의 최면입니다. 촛불도 사그라지기 전에 한번 긴 한숨으로 불꽃을 크게 피웠다가 숨을 거둡니다.  그 촛불이 맥베스 왕의 독백처럼 허무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삶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 위에서
으스대다 안달하다 사라지고 마는
불쌍한 배우처럼,
백치가 지껄여대는 공허한 소음과 분노로 가득한,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


셰익스피어 <Macbeth, Act V Scene 5>  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