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4일 서유럽 3개국 여행을 다녀 온 지 딱 1년 만에 2025년 11월 4일 동유럽으로의 여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여행에 있어서는 그 진리가 더욱 어김이 없습니다. 여행지 현장에 섰을 때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자신만의 것으로 재탄생될 수 있어야 그 여행의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뱀이 마신 물은 독이 되지만 같은 물을 마신 소는 우유를 생산해 냅니다. 여행이 '毒(독)'이 될 리는 없지만 가슴속에 자신만의 앨범과 기록을 남기지 못한다면 '旅毒(여독)'만 남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맛있는 국수를 삶는 데 중요한 식재료는 다시물입니다. 밀 쌀 콩 어느 것으로 만든 면이냐에 따라서 국수의 맛이 달라지지만 아무래도 국수의 맛은 다시물을 뭘로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여행이 국수를 맛보고 먹는 일과 같다면 여행의 맛을 좌우하는 다시물에 해당하는 것은 그곳의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과 주변의 나라들과의 관계, 즉 역사일 것입니다. 역사를 알지 못하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마치는 여행을 한다는 것은 맹물에 면을 말아먹고 나서 국수를 먹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입을 다시며 군침을 삼키는 여행객만이 농짙은 객창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저절로 얻어는 게 아닙니다.
희로애락 오욕칠정으로 점철되지 않은 인간사 없습니다. 하물며 거대 인간집단인 한 나라가 겪어온 흥망성쇠의 역사는 지리 기후 민족이라는 이미 결정된 자연조건 위에 정치 경제적 상황에다가 '나비효과'까지 얽힌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입니다. 어떻게 보면 역사는 드라마틱한 논픽션 사건을 병풍(屛風)으로 구현해 내는 일과 같습니다. 자연조건의 씨줄과 정치 경제의 날줄로 얽어진 베에다가 사람마다의 형형색색의 실로 수를 놓고, 나무틀에 맞추어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만들어진 작품은 또 다른 작품과 엮어지고 그리고 또 다른 작품과 또다시 엮어지며 한 폭의 병풍이 만들어지는 것이 역사입니다.
역사에 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이 부족한 나 같은 범부가 여행을 두고서 역사와 함께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건방진 일입니다. 영어 단어 'cocky'는 수탉처럼 군다는 뜻으로 젠체한다는 의미입니다. 여행을 두고서 역사를 운운하는 나에게 누군가가 Don't be Cocky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행지 현장에 섰을 때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이 떠올라 남몰래 은밀한 cock이 되는 건방진?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 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어야 다음번의 여행을 계획할 동기부여가 됩니다. 사진으로만 본 맞선 상대를 직접 만나서 모습을 확인하고 대화를 나누어보고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과정이 여행의 과정과 같습니다. 여행지가 반려자의 경지에 오르면 그 후로 자주 찾아가게 되든가, 가지는 못하더라도 두고두고 그리워하는 곳이 됩니다. 안 가본 곳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곳은 없는 그런 나라, 그런 도시를 가진 사람은 땅 부자를 넘어서는 진짜 '부동산 부자'입니다. 땅부자는 팔 궁리만 하고 여행자는 가슴 속에 담은 도시를 계속해서 개발합니다.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4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는 지리적으로 국경을 나누고 있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역사적 공통분모를 가진 나라들입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서로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중제국으로서의 운명을 함께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게르만족이면서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다른 나라가 된 근거, 오스트리아인 히틀러가 독일 총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궁금합니다.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걱턱이 오스트리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스페인에서 심하게 나타난 건 왜일까. 땅 속 깊은 곳에서 응집된 힘이 쓰나미로 도시를 덮치듯, 밀물로 달려든 훈족으로 썰물처럼 밀려난 슬라브족과 게르만족. 사랑하는 사람은 궁금의 대상이 됩니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궁금증을 자아내는 역사를 가진 나라는 여행객의 짐을 꾸리게 합니다.
가슴이 떨릴 때 떠나야 합니다. 다리가 떨리면 떠나지 못합니다. 아직은 떨려야 할 것이 떨리고 있고 떨리지 않아야 할 것이 떨리지 않으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이 호시절이 얼마나 갈지는 모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일 뿐입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이 말을 오래도록 외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