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what you say
의원 양반, 당신의 말이 곧 당신입니다
언어는 약속이자 합의입니다. 여기에서의 합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칙입니다. 합의를 벗어나는 언어 사용은 바벨탑을 쌓던 이들과 같은 분열을 초래합니다. 단어와 문법규칙도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짧게 발음하는 '눈'은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을 말합니다. 길게 발음하는 '눈'은 겨울철에 비대신 내리는 하얀 눈입니다. 낮잠과 오수는 같은 행위이지만 계급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낮잠은 머슴이 자는 잠이고 오수는 임금님이 주무시는 잠같이 느껴집니다. 같은 말일지라도 듣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말의 어감(nuance)이 달라집니다. 목재(木材)는 건축을 하거나 물건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로 된 재료입니다. 재목(材木)은 장차 큰일을 할 만한 능력이 있거나 어떤 직위에 적절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이렇듯 말은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을 드러냅니다.
나라마다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의 우위를 매길 수는 없습니다. 배우기 쉽고 어려운 언어, 발음이 듣기 아름다운 언어 등으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 또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많을수록 단어수가 많아지고 표현방법이 다양한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나라는 역사가 길고 온대지방으로 사계절이 있고 산이 많고 삼면이 바다로 싸인 반도국가입니다. 긴 역사 속의 사건, 인물이 많아 그에 얽힌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고, 철마다 연관된 어휘들이 많고, 육지에 관한 어휘뿐 아니라 바다에 관한 어휘도 다양합니다.
사람과 자연의 다양함에다가 발생하는 현상들이 다양하면 그에 관한 단어들도 그만큼 늘어납니다. 거기에다가 특정기간에 비슷한 시기에 걸쳐서 다양한 현상들이 발생하면 언어가 훨씬 더 복잡해집니다. 우리나라에는 예전에는 양반 상민으로 신분이 구분되었습니다만 신분의 차별이 없어진 지금에는 백성들이 국민, 민중, 대중, 군중, 인민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리를 나타내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는 똑같지 않습니다.
민중재판, 인민심리, 국민교통, 민중심리, 대중배우 등의 말은 뭔가 어색함이 느껴지는 말들입니다. 배우자를 잘못 만나 이혼해야 할 부부 같습니다. 인민재판은 맞아도 대중재판은 어색합니다. '재판'이 '인민'이란 배우자를 두고 '대중'과 저지른 외도입니다. 환갑잔치를 육갑잔치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누추한 곳에 납신 귀한 분, 겨울에 핀 철없는 장미. 꿔다 놓은 어색한 보릿자루 같은 어색함이 느껴집니다. 단어마다 궁합이 맞는 배우자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민중가요, 인민재판, 대중가요, 대중교통, 군중심리, 국민배우 등은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국민, 민중, 대중, 군중, 인민에는 설명하기 애매한 정서, 말의 뉘앙스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다양해졌고 복잡해졌다는 방증입니다. 민초들의 자유와 인권이 살아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과 추구하는 바에 따라 민중이 되고, 군중이 되고 인민이 되기도 할 테니까요.
우리나라는 금세기 들어서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친목과 화목을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반목이 심해졌습니다. 빈부격차, 지역갈등, 이념갈등, 보수진보, 우파좌파, 건국시기, 친일청산 등입니다. 종교계, 연예계, 체육계마다 파벌로 시끄럽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얼마 전에 '마녀사냥'이라는 중세기에 벌어지던 일을 표현하는 단어가 쓰이더니 드디어 공산주의 국가의 '인민재판'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습니다. 괴물 단어가 계엄군처럼 청문회장에 난입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무슨 뜻인지도 모를, 평생 한 번도 듣지 못할 말을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듣고 사는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탄핵'이라는 괴이한 놈이 국민, 인민, 대중, 군중, 민중 중에 어느 배우자와 만나는지에 따라 국민들은 사분오열하고 콩가루 국가가 됩니다.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이라는 지구 역사상 초유의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이성으로, 휘둘리지 않고, 주변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오직 사실에만 입각하여 판결을 내려야 할 헌법재판소가 재판관을 누가 임명했느냐 누가 추천했느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는 생각을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양극화'라는 단어의 뜻은 '우리 미래세대의 기대수명이 다시 70년 중반으로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이란 단어의 뜻은 '우리 미래세대의 가정에 냉난방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헤겔의 정반합, 아널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식의 '발전을 위한 갈등'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방식이 '갈등'이고 우리의 정체성이 '양극화'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 두렵습니다. 미래의 주인인 우리의 후세를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희한한 현상이 발생하면 종전의 단어로는 표현이 안됩니다. 새로운 말을 만들어 표현해야 합니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단어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사회를 소망합니다. 죽을 때까지 듣고 싶지 않은 괴물 같은 단어들을 만들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염원합니다. 내가 먹는 음식과 내가 입는 옷이 곧 나이듯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바로 우리 자신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