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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돈돈 껄껄껄

있을 때 잘해

by 흐르는강물처럼

없었더라면 없는 대로 살아졌을 터이지만 사라지면 아쉽기 짝이 없는 게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이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인데 갑자기 사라지면 참 난감합니다.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표 나는 건 애초에 없었더라면 없는 대로 살아졌을 텐데, 있던 자리가 비게 되면 눈길 손길이 자꾸만 그리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앓던 이도 빠지면 시원하지만 혀는 텅 빈 그 자리를 계속 핥습니다.


건강, 재물, 관계, 말 등. 세월이 지나고 나면 후회되는 게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세월에 대한 후회가 제일 큽니다. 인간사 모든 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 일어난 것들이니 그렇습니다. 십 년만 더 빨리 했더라면, 십 년만 젊었어도~ 하면서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후회합니다. 우리는 세월을 돌리고 싶어도 돌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세월은 불청객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내가 초대한 손님입니다. 이 손님을 오래 머물게 할 수도 있고 빨리 떠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잘 대접해서 보내야 뒤탈이 없습니다. 뒤끝이 길고 잘 삐치는 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마지막일 줄 몰랐어요. 이렇게 빨리 가버리실 줄 몰랐어요." 짧은 이 말속에는 참 큰 게 들어있습니다. 후회, 회한, 참회이고 때로는 속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게 마지막일 줄 몰랐어요 라는 말에 대한 예방책은 '있을 때 잘해'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을 백분의 일만 헤아릴 수 있어도 그 아들은 효자가 된다고 합니다.


조선朝 중기의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던 松江 澈(송강 정철)이 지은 잘 알려진 시조가 있습니다.


부모님 살아실제 섬기길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닮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아무리 효자 소리를 듣는 사람이어도 후회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살아 계실 때 잘 모시지 못한 것을 두고 '사람의 삶에 고쳐 못할 일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송강은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뿐 아니라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간 연인, 연락이 닿지 않는 죽마고우,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 또한 있을 때 잘하지 못한 한을 품게 합니다.


사람이 가진 취약점 중에 하나는 시간에 대한 감각입니다. 현재가 영원한 것인 줄 착각합니다. 지구에 사는 지구인이면서 자신이 태양인 줄 압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 때문입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굳기 전의 시멘트는 내 뜻대로 다듬을 수 있지만 굳어버린 시멘트는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므로 현재를 잘 다듬어야 미래에 후회를 덜 할 수 있습니다.


하릴없이 보낸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쉬워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은 그런 우리들의 고독과 과거에 대한 회한을 기막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산모퉁이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중략)


'그대여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라고 음유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회한하는 외로운 이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내용을 담은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지나간 것이 후회되지만 마냥 헛된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니 슬퍼하지만 말자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요. 누구나 가까운 사람끼리는 한두 번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을 겁니다. 다시 젊어지고 싶습니까?


대부분의 대답은 젊어지고 싶다는 쪽일 것입니다.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 내가 십 년 전에는 펄펄 날아다녔더랬지 이런 말을 많이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 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삼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전에는 길을 몰라 계곡으로 깊이 들어가 고생을 하기도 하고 길이 없는 곳으로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오기도 합니다. 고생 끝에 정상에 오르고 나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제야 계곡과 능선이 훤하게 다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 '삶의 정상'에 가까워지면 자신만의 인생 나침반을 하나씩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젊어지면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다시 젊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나 봅니다. 어쨌건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놓고 싶은 마음인 것은 확실합니다.


대로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두 가지 때문일 것 같습니다. 삶이란 고해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으니 어차피 살아봐야 고생을 한 번 더 할 뿐이라는 생각과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다시 살아도 지금보다 더 잘 살아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몇 년 전 친구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아서 대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 아니야. 자네는 충분히 잘 살아왔으니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네.


친구는 듣고서 아마도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반듯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만일, 내가 그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자네, 다시 젊어진다면 더 잘 살 자신이 있어?


대답은 긍정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대답을 들었을 가능성이 더 컸을 겁니다. "그만하면 아주 훌륭하게 잘 살아오신 겁니다" 하고 주변에서 인정을 하더라도 정작 본인은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 한 번 더 뜨거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을 것이고, 멋진 사업을 눈부시게 이루어 화려한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지만 과거로 돌아가 잘못했던 일들을 바로 잡고,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게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還至本處(환지본처), 본래(本)의 제 자리(處)로 돌아간다(還至)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시간에 대한 還至本處(환지본처) 귀소욕구도 가지고 사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그곳'에 대한 욕구 못지않습니다. 지금 겪는 아픔의 원인이 '그때' 이므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기에서는 나중에 아플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나마 지난 시절에 대한 후회를 할 수 있다면 그래도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노욕(老慾)이 지나치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노욕 중에 가장 고래 심줄처럼 질긴 것은 돈욕심일 것입니다. 애정욕은 사춘기에 접어들어야 생길 것이고, 권력욕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싹틀 것이며, 명예욕은 사십나이에 들어서야 제대로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위력은 장난감 가게를 들락거리면서부터 진작에 알게 됩니다. 노욕이란 말의 뜻은 '늙은이의 욕심'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사에서 생기는 욕심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늙은 욕심, 노욕입니다. 욕심 중에 가장 어른입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돈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문제입니다. 돈이란 밑바닥 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양심도 명예도 그 바다에 빠지면 다시는 떠오르지를 못할 수 있습니다. "재산을 많이 가진 자가 그 재산을 자랑하고 있더라도 그에 대한 칭찬을 보류하라, 그가 그 재산을 어떻게 쓰는지를 알 수 있을 때까지" 소크라테스의 말입니다.


부자가 다른 부자들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경우를 아직 보지를 못했습니다. 부자가 되지 못한 범부들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부자가 돼보지도 않고서 그런 말을 하다니, 당신도 부자가 되고 난 뒤에야 이런 말을 해야 할 것'이라고 부자들은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 기택(송강호 扮)의 아내 충숙(장혜진 扮)은 이렇게 말합니다. "돈은 다리미거든. 성격 구김살을 펴준다. 나도 돈 많으면 착해질 거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이런 말을 하는 범부에 대한 정당성은 그 범부가 부자가 될 때까지 유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부자 되기 전과 후의 그 사람은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큽니다. 개구리와 올챙이는 같은 동물이지만 개구리는 양서류이고 올챙이는 수서류(水棲類)이듯이요. 해버린 말과 한 짓과 떠나간 사람과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는 후회를 하지만 돈을 모으는 것과 쓰는 것에 대해서는 후회를 끝까지 유보합니다. 미루고 미룬 후회가 마지막 호흡을 하는 순간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번 돈으로 노벨상 설립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간송 전형필은 막대한 재산을 들여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서적, 석조물 등을 수집해서 우리나라에 남긴 인물입니다. 폐휴지를 수집해서 일평생 번 돈을 대학교 장학금으로 기부를 한 분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국가에 납세해야 할 세금이 너무 과하다고 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는 부자들도 많습니다. 국정을 논하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비트코인과 주식거래를 하다가 국민들의 지탄을 받은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덜 낸 세금과 주식거래해서 번 돈으로 장학기금을 만들고 국가문화재 보존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국민의 돈, 나라의 돈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승처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내 돈'인 것처럼 마구 집행하는 정치인들도 많습니다. 정승처럼 돈 벌어서 개처럼 돈 쓰는 정치인입니다.


개같이 벌더라도 정승같이 쓰라는 게 돈입니다. 꼭 부자들만이 돈 욕심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아니어도 돈 욕심이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부자들도 처음에 돈 벌던 시절에는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번 뒤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개 또는 정승이 되도록 만드는 게 돈입니다. 돈도 있을 때 잘 써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고 그 돈이 내 돈일 때 잘 써야 합니다.


가수 나훈아는 자작곡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 ♪잠시 왔다 가는 인생, 천년을 살 것처럼~ ' 이성, 도덕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본능과 욕구가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때가 노년기입니다. 갑골문의 '추(芻)'字는 풀 두 포기를 양손으로 감싸 잡고 뽑는 형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추'는 소의 먹이가 되는 꼴(풀)을 뜻합니다. 소는 꼴을 씹어 먹고 나중에 위장에 든 먹이를 게워내어 다시 씹어 삼킵니다. 이를 되새김질이라 하고 한자어로는 반추(反芻)라고 합니다. 노년기는 우리의 가슴에 들어있는 '하고 싶어', '해야지', '할 거야'라는 행동양식으로 이루어 낸 것들을 반추하여 '하지 말 걸', '그 말하지 말 걸', '왜 그랬을까'로 되새김질하여 씹는 때입니다.


몸이 건강할 때에는 소화력이 좋아 맛있는 걸 찾아 먹는 데, 건강한 젊은 몸매를 돋보이게 할 옷을 사는 데, 몸이 뜨거울 때이니 맛있는 음식과 내 몸과 옷을 찬양해 줄 이성을 찾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을 들입니다. 달도 차면 기웁니다. 프랑스어로 황혼을 뜻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 L’heure entre chien et loup)'에 들어서게 됩니다. 체력이 떨어지고 몸의 감각이 둔해지기 시작하면 '늑대'처럼 살던 젊은 시절의 일들 때문에 유순한 '개'의 삶을 살게 될 때가 되면 한숨을 자꾸만 쉬게 됩니다.




여기에 삶의 반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크게 필요한 것이 없어집니다. 먹어도 맛을 잘 모르겠고 먹으면 소화시키지를 못하고, 몇백, 몇천만 원짜리 비싼 옷을 입어도 만 원짜리 티셔츠 입고서도 뽐내지던 젊음을 당하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면'이 '체력이 떨어지면' 또는' 노쇠하면'이라는 말로 바뀌어야 합니다. 결국, 이성, 도덕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본능과 욕구가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때는 막연한 표현인 ''노년'이 아니라 체력이 떨어지는 때입니다. 결국, '껄껄껄'은 나이가 아니라 건강과 체력이 그 시기를 좌우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가수 최백호의 노래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세월이 아니라 젊음이요 체력입니다.


그러할지라도,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오랫동안 살되, 껄껄껄 후회하는 시간은 되도록이면 일찍 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재테크보다는 젊음테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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