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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Mar 15. 2024

불량품들의 사계

국수나 삶자 78

국수나 삶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까불이는 방문을 열어달라고 보채지도 않는다. 여자 친구랑 보일러실에서 배를 지지고 있는가 보다. 방 안 온도 14도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10도를 넘나들었다. 비가 와도 포근하다.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워 얼굴만 내놓고 있다. 이런 내 모습이 포대 자루를 방바닥에 던져놓은 것 같다.

세상이 젖으면 몸은 풀이 죽지만, 감정은 생기가 돈다. 식물들도 마찬가지. 농부들을 생각하면 시원하게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 빗소리는 방안까지 들어와 방바닥을 핥고 있다.  

    

‘부추, 대파, 쪽파, 달래, 냉이, 벼룩이자리는 땅속에 발목을 딛고 싹을 내밀 채비를 하고 있다. 새들은 어디서 몸을 녹일까? 아하! 새들은 털옷을 입었지!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우고 점심이나 먹자!’

이불을 풀고 벌떡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나도 모르게 그만 가스레인지를 켰다. 추울 때 가스레인지를 켜서 방을 데우는 습관이 생겼다. 바쁘지도 않은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두서없이 다녔다. 설거지통에 일주일 치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접시, 밥그릇, 냄비와 수저를 8개 닦았다. 아침을 안 먹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집에서 두 끼만 먹으니 계산하면 4일 먹었다는 것이다. 미역국 끓이다 맛보고 던져놓은 것 합하면 집에서 밥 먹은 날이 3일이나 될까? 어디를 그렇게 싸 돌아다녔는지....   

  

며칠이 지났을까. 햇살이 따사롭다. 창문을 열었다. 대추나무 아래 달래가 멀리서 보아도 싹을 내밀었다. 햐아, 반가웠다. 밥 먹는 것은 뒷전으로 치고 마당에 나가려고 양말을 신었다. 나비 녀석이 나타나 문 열어 달라고 울었다.

“여자 친구랑 쌈 했냐?”

까불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내 정강이를 비빈다.

“야야 됐고, 밭에 가서 달래나 캐자.”

까불이는 밭에서 똥 싸느라 눈을 질끈 감고 힘을 준다. 흙을 긁어 똥을 덮는다.

뒷방 할매가 밭에 버린 귤껍질을 쪼던 참새들이 떼로 날아오른다. 노랗던 싹 안으로 벼룩자리 새싹이 났다. 김장하고 남았던 적갓이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했는데 생기를 완전히 찾았다. 밭 가장자리에 대파 속을 겉잎이 감싸고 있다. 대파는 1월 말부터 겉잎이 바람막이해 준 덕에 눈보라 속에서도 새끼손톱만큼 자랐다. 속잎을 감싼 저 겉잎,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겉잎 같은 엄마가 생각난다. 어렸을 때 밭에서 캐온 보리 새싹과 벼룩이자리를 넣고 엄마는 홍어애탕을 끓였다, 내가 태어난 이래 역사상 아니 단군 이래 그렇게 맛있는 홍어애탕은 지금까지 먹어 본 적이 없다.


‘오늘 같은 날 홍어애탕을 먹고 싶지만, 엄마가 하늘에 계시니... 국수나 삶자.’

비가 올 것 같다. 대추나무 아래 달래를 슬쩍 뽑았다. (작년 봄 동생들이 달래를 훑다시피 해 성길씨에게 달래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었다)냉이도 캤다. 흙을 탈탈 털어 들고 왔다. 까불이는 저랑 상관없는 일이라 재미가 없었는지, 빗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멸치 육수를 냈다. 냉이와 달래를 숭숭 썰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김장김치를 칼로 조사 국수 위에 올렸다. 배가 잔금 나게 국수를 먹었다. 마당이 어두워졌다. 비가 시난고난 내린다.

한밤중 비의 속도는 빨라졌다. 새싹들이 말끔하게 차리고 거침없이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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