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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Mar 25. 2024

불량품들의 사계

검도장에서 머리를 맞고 넘어졌는데 별이 82

검도장에서 머리를 맞고 넘었는데 별이 2   



  

내가 도장 다닌 것을 가까운 지인 두 명만 알았다. 사람들에게 도장에 다닌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중간에 때려치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입이 간질간질해 도복 입은 사진을 올렸다. “얘들아, 무림의 고수 같지 않냐?

     

그렇지만 여태 도복 하나를 제대로 착착 못 입었다. ‘왜 이리 옷 입는 것이 복잡한 것이여’ 이것도 하나의 수련과정이었다. 도복을 앞뒤 바꿔 입었다가 벗기 일쑤, 끈을 잘못 매 관장님이 고쳐 매 준 게 몇 번째였던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도복을 제대로 입었다.   

  

들소 씨와 재수생 나영 씨는 나보다 늦게 도장에 등록했었다. 그녀들은 날마다 나와 연습을 했다. 기합 소리는 도장 안을 한 바퀴 돌고 내 귀에 꽂혔다. 활기찼다.

간혹 보인 은영 씨는 나보다 먼저 왔다. 20대 경찰인 그녀는 키가 크고 날렵했다. 도복만 입고 연습할 때는 멋있는 줄 몰랐다. 호면을 쓰고 갑과 갑상을 착용한 그녀는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나도 도장에 발을 들인 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호면을 쓰고 싶었다. 마치 내 맘이라도 알아챈 듯 관장님이 말했다. “이제 호구를 갖추셔야죠” 했다. 그러나 호구 세트는 돈이 만만치 않다. 나는 고민했다.   

  

내가 덜렁대는 성격이지만 이런 일에는 신중하다. 과연 내가 끝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틀 지나 호구를 구입하겠다고 했다. 돈 때문에 고민을 한 것을 알고 큰언니가 일부 도와줬다.

호구 입은 나의 멋진 모습을 생각했다. 절로 입속에서 ‘다 죽었어!’가 튀어나왔다. 호구는 신청한 지 한 달이 지나서 도착했다. 드디어 옷을 입었다.

나의 설렘은 유리에 금 가듯 와장창 깨졌다. 다리 아픈 것은 둘째였다. 호구를 입는 절차가 너무 어렵고 무거웠다. 도복도 겨우 편해졌는데 그 위에 호구를 착용하니 얼마나 힘든지. 연습이 끝나면 호구를 정리해 갖다 놓는 것도 힘들었다. 호면을 쓰고 연습할 때 눈에 땀이 들어가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맨다. 옷을 벗기 불편하니 목이 말라도, 화장실도 참아야 한다. 그래서 도장 가기 전 물을 마시지 않았다. 옛날 장군들은 이 무거운 걸 입고 쓰고 전쟁터에서 어떻게 싸웠을까. 그 옛날에 안 태어나기를 백번 잘했다.   

  

나는 의례라도 치르는 일처럼 집에서 최대한 휴식을 취하고 도장에 갔다.

그래도 호면 쓸 생각을 하면 도장에 가기 싫어졌다. 초등시절 학교 다니기 싫은 병이 도졌다. 도장 근처까지 갔다가도 발길을 돌렸다. 아이들이 학원 가기 싫어 갑자기 배가 아프고 오줌이 마렵다는 것이 이해되었다. 검도장을 가지 않으려고 오만 핑계를 다 댔다. 신문에 오늘의 운세가 질병 조심이라서, 나는 황반변성이라 눈에 땀이 들어가면 큰일 나서. 친구가 핸드폰 하러 간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땡땡이치고, 생일 달에는 노는 것이야, 하면서 3주가 지났다. 도장 안 가는 날이 길어지자 점점 불안했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받기 싫고.... 환장하겠네.

나는 이마트나 홈플러스에서 시장 보는 것도 싫어한다. 동네 슈퍼나 편의점에서 후다닥 집어 들고 나온다. 복잡한 것을 싫어한 나는 호구 착용하는 것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스키 타러 가서 스키 장비 무게가 엄청난 친구에게 “스키부대야 뭐야. 이거는 노동이지” 친구를 엄청 놀렸었는데 미안해졌다.

그날 스키장에서 친구를 기다리다 베어진 자작나무를 주워 들고 검도 연습을 했었다. 추풍낙엽 베듯 불의를 베리라 꿈을 꾸면서. 자작나무를 집에 가져와 달밤에 마당에서 후려치기를 했다. 뭐 그때까지만 해도 호구가 저리 무겁고 입는 절차가 까다로울지 젼혀 몰랐다.   

   

그나저나 도장 안 갈 핑계도 없고, 호구 맞춘 돈도 생각이 났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그래 가자!’ 술집에서 양아치들 머리를 갈겨주고, 친구들에게 돈을 뜯는 학생들 손목 조사 주고, 젊은 여자에게 돌려 차기 해서 성폭행하려는 몸뚱이 일격에 제압하고. 지금 사는 산밑 내 집에 괴한이 들어오지 못하게. 다시 한번 검객을 꿈꾸면서 도장에 가기로 맘먹었다.

    

도장은 그녀들과 꼬마들의 기합 소리로 가득 찼다. 그녀들에게 도장에 빠진 이유를 말했다. 그녀들도 호면 쓸 일이 괴로웠다고 했다. 하지만 호구 세트 맞춘 돈 생각나서 나왔다고 했다. ‘내가 양은 냄비가 아니었구나.’

그녀들은 나보다 몇 단계 앞서갔다. 농땡이까지 말고 나올걸... 후회했다.

그녀들은 연격 공격을 식은 죽 먹듯 서로 기가 차게 받아줬다. 나는 그동안 공격 연습만 했었다. 나도 그녀들 상대로 받아주는 연습을 했다. 나는 받아주는 것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뒤로 가는 스텝이 꼬인 것은 둘째고 스텝이 맞으면 손이 틀렸다. 점점 그녀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어느 장소에서나 남녀노소 나이를 따지지 않고 스스럼없이 지냈고, 뭐든 빠닥빠닥할 줄 알았다. 그들의 빠른 발놀림과 손놀림은 부러웠다. 나도 몇 년 전만 해도 금방 해치웠을 것을 생각이 드니 나이 듦을 절감했다.

실은 들소 씨에게 머리통 맞고 자빠졌던 날 집에 올 때 ‘이제는 술 몇 잔만 마셔도 졸리고 하루 놀고 삼일 쉬고 아닌 것은 아니구나 ’ 생각하면서 훌쩍거렸었다. 이쯤 되니 도장을 나가지 말까 고민했지만.

    

어느 틈에 내 손에 다이소에서 사 온 밀대가 들려있었다. 방 안에서 후려치기를 했다. 여세를 몰아 마당으로 돌격했다. 호두나무 아래서 연격 받아주는 연습을 했다. 스텝을 밟으며 받아주는 연습과 공격을 번갈아 했다. “야합” 기합을 나도 모르게 질렀다. 고양이는 평상에 앉아 나를 보고 있다. ‘국가대표라도 나가는 거요?’

가로등이 비친 호두나무이파리가 선명했다. 호두나무 몸통을 겨누고 찔렀다. ‘호두나무는 뭔 죄여’ 미안했다. 기합은 큰소리로 하지 못했다. 혹시 술고래 풀치가 설칠지 몰라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내일은 그녀들의 공격을 실수 없이 받아주자. 그리고 들소가 천둥처럼 내 머리통을 내리치더라도 눈감지 말고 주눅 들지 말자. 이런 다짐을 하면서 자작나무로 하늘을 베었다. 고양이가 사라졌다. 구름에 가린 초승달이 꼭 칼에 베인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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