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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Apr 03. 2024

불량품들의 사계

팽팽한 비닐 끝을 놓아버렸다  85

팽팽하던 비닐 끝을 놓아 버렸다

             

겨우내 굳었던 혀가 풀렸다. 김장독에서 김장김치를 꺼내어 냉장고에 넣었다. 항아리를 씻고 평상에 앉아 바람에 말을 걸어본다. 성길 씨가 어깨를 좁힌 채 쪼그리고 앉아 상추씨를 뿌리고 있다. 씨 뿌릴 때 꼭 나한테 말을 해주라고 했는데 저 인간은 내 말을 콧방귀로 알아듣는다. 꼭 저 혼자 파종을 한다. 섭섭했지만 나는 으로만 투덜거렸다.

‘그래 농사 잘 짓는 것도 자랑거리다.’

      

 나는 작년에 한의원에서 가져온 한약 찌꺼기를 밭에 두고 비닐을 덮어 썩혔었다. 며칠 전 그것을 거름과 섞어 밭에 뿌렸놓았다.

‘땅도 보약을 먹어야 힘을 쓰제.’       


작년에 성길씨네 밭의 상추가 싹이 돋고 난 후 나는 3월 하순에 씨를 뿌렸다. 그랬더니 상추 따는 게 늦었다.      


그래서 올해는 성길씨 따라 오늘 상추씨를 뿌렸다. 무슨 바람이 이렇게 세게 불까. 밭에 비닐을 씌우려는데 바람이 비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마당 입구에서 담배를 물고 성길 씨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저씨, 비닐 좀 잡아주쑈?”

“내 것도 하기 싫어 안 하고 있는데.”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까짓 거 엉덩이 한 번 움직이고 손 한 번 잡아주면 되는데, 아차 말이 틀렸다. 비닐 끝 한 번 잡아주면 되는데... 그런데 좀 전에 내가 투명비닐 잡으러 이리저리 뛰고 다니는 나에게 성길씨는 물 사러 마트에 같이 가자고 했었다.

‘그래 그럼 나도 너랑 물 사러 안 갈란다’ 내가 결심하려는 찰나, 그는 자신이 내게 물 사러 가자고 했던 게 생각났는지, 얼른 달려와 밭 끝에 서서 바람에 뒤집어지는 비닐을 단단히 잡았다.

“둘이 헌께 일이 금방 끝나잖아요.”

나는 말을 하고 밭에서 나왔다.     

성길 씨는 벌써 마트 갈 채비를 하고 차 옆에 서서 말했다.

“얼른 갑시다.”

그럼 그렇지 물 사러 빨리 가려고 날 도와준 거구나.

‘에라 이. 성길아!’

성질이 나보다 더 급한 줄 알았지만, 번개 불에 오늘 콩 볶자는 것인지.

“나, 점심도 안 먹었는디? ”

나는 아침 안 먹은 지 수십 년이다. 그래서 점심을 놓치면 저녁 한 끼 먹는다. 그래서 점심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점심은 갔다 와서 먹어요.”

성길 씨는 차 옆에 붙어서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는 맘먹으면 해야 한다.

나는 만두를 쪄서 코에 발랐는지, 입에 발랐는지, 서서 급히 먹어치우고 마당으로 나왔다.

“벌써 밥 먹었어?”

너무 빨리 나온 나를 보고 성길씨 노모가 말했다.

“밥에 물 말아먹었겠지.”

촉새처럼 성길 씨가 말했다. 자기가 재촉해서 서서 먹고 나온 나에게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말했다. 가던 정이 돌아오는 중이다. ‘너랑은 종 땡이야’ 나는 오늘도 성길 씨에게 종을 몇 번 쳤는지 모른다.     

마트에 도착해서 나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는 성길씨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아저씨, 물만 사서 얼른 나오세요! 나도 급한께”

그는 내가 왜 그러는지 전혀 눈치를 못 챘다.   

  

집에 와서 잠깐 누웠다. 바람이 비닐 때리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다. 밖을 내다봤다. 성길 씨가 밭에 비닐을 덮으려고 이리저리 방방거리고 있었다. 이쪽 잡으면 저쪽 끝이 날아갔다. 날아오르는 것 돌로 눌러 놓으면 다른 쪽이 확 뒤집어졌다.

“그래 고생 좀 해보쑈. 아까 내 맘 알 것지요”

나는 삼 초 지나 밭으로 나갔다.

“내가 잡어 주까요?”

“됐어요.”

“됐기는 뭐가 됐어요.”

그러든가 말든가 밭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연탄창고 쪽에서 그는 계곡 쪽으로 등을 두고 비닐 끝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나는 비닐 끝 잡은 손을 놓아버릴까 그래서 그를 ‘발라당 자 빠쳐 불까’ 생각했다. 그가 손에 힘을 최고로 주는 순간 비닐은 돌을 올려놓아도 가라앉지 않을 만큼 팽팽하였다. 나는 그때 나도 모르게 손을 놓아 버렸다. 그는 그대로 비닐 끝을 잡고 자빠져 버렸다. 나는 “어쩌까, 나도 모르게 그만” 말을 하고 일어나 성길씨에게 갔다. 그는 “허허 나 참” 하면서 땅을 짚고 일어나 쪼그리고 앉았다.

나는 절대 고의로 손을 놓은 게 아니었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손목을 다쳐 물건을 자주 떨어트린다. 진짜다. 굳이 독자가 파고든다면 ‘실은 살짝 힘을 빼버렸단께.’

우리는 다시 다정히 끝과 끝을 꼭 잡아당겨 밭을 덮었다.

“어쩌요? 둘이 손을 보탠께 금방 끝나고 좋지요? 자빠지기는 했지만.”

그는 그냥 웃었다.

오늘같이 마구잡이로 부는 바람도 둘이라 잡아 앉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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