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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Apr 05. 2024

불량품들의 사계

눈발은 쌀도 코인도 아니다 86

눈발은 쌀도 코인도 아니다 



         

때아닌 폭설이다. 눈 한 방울이 마을을 덮쳤다. 손을 뒤로 감추면 눈발이 멈출까. 길 잃은 순례자처럼 나무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북극 이누이트들이 사는 이글루가 생각난다. 나는 지금 얼음동굴 속에 혼자 있다. 눈이 쌓일수록 먼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최소한 내 몸을 녹일 수 있는 거처가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퍽’ ‘퍽’ 소리에 몸을 돌렸다. 난로 위에 올려놓은 밤이 터진다. 난로 앞에 누워있던 까불이 귀가 바짝 섰다.

“까불아 너는 행복 헌 줄 알어라.”

까불이는 몸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폈다.

“니 여자 친구 도도는 어쩌고. 너만 살고 보잔 뜻이야? 그러다 너 까인다.”     

 

어슴푸레한 마당을 덮고 있는 눈 위에 발자국이 찍혀있다. 밖으로 나가 발자국을 따라갔다. 찢어진 비닐 틈으로 연탄창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까불이 여자 친구 ‘도도’가 삽과 괭이 아래, 바구니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도도는 나를 보고 연탄 뒤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 나는 도도 발자국을 피해 집으로 들어왔다. 방에 누워있는 까불이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도도가 안 따라온다고 했다고요. 나보고 어쩌라고요?’ 눈동자를 세로로 세우며 까불이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까불이가 소파 위로 뛰어올랐다.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나는 그 눈길을 따라 바깥을 내다봤다. 지난가을부터 마당에 나타난 턱시도 고양이였다. 얼굴이 까불이랑 닮았다. 혹시 형제일까.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고골 고양이들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다.

나는 그동안 성길 씨 몰래 고양이 사료를 주곤 했었다. 고양이는 방문을 열어놓으면 어느 틈에 들어와 능글맞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아, 너까지 또 키워야 허냐.?”

상상도 하기 싫은 예감이 밀려왔다.      


어느 날 마루에서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고양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야, 나가라, 밖에서만 보자.”

그날 이후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저 눈 속을 파헤치고 오늘 나타난 것이다. 다행이다.  

   

나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평상 밑에 밥을 넣어 주고 처마 밑으로 물러났다.

해가 진 마당은 오히려 환했다. 하염없이 쌓이는 눈발을 향해 공양하듯 두 손을 내밀었다.

“ 저 눈송이가 쌀이고 안부이면 얼마나 좋으까.”

그러면 떠도는 모든 것들이 굶어 죽는 일은 없을 텐데.

티비 속, 몸보다 머리가 큰 아프리카 오지 아이들 눈동자가 깜박거린다.

화면 밖 고양이는 허겁지겁 사료를 먹고 눈꽃을 찍으며 설원으로 사라진다. 삽으로 눈을 파면 팔수록 아이들 갈비뼈와 흰 이가 드러난다.


고양이들은 천막으로 덮어진 지붕 틈으로 들어와 눈보라를 피하고 있다. 천정에서 휘어져 웅크리고 있는 산맥들이 소리 죽여 울고 있다. 그 소리가 너무 가까워 방에서 들리는 것 같다.  천장 아래 누워 오만가지를 생각한다. 이곳 고골은 재개발로 곧 쫓겨난다. 두 발이든 네발이든 더는 정을 주면 안 된다.

하지만 그 고양이가 눈에 밟혀 뒤척거렸다. 그 고양이을 아는 대전 사는 순원 동생에게 전화했다.

“그 고양이 말야,  지금 들어오라 허고, 날 풀리면 나가라고 허까?”

“근데 고양이가 말을 알아들으려나.”

“고양이가 날이 풀려도 안 나간다고 허면 어쩌까.”

“언니가 정들면 쫓아내겠어?”

“그래 독허게 맘 먹을란다.”     

언제 마음이  변할 줄 모르겠지만 그동안 그 많은 것들에 독해지자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까불이는 전기장판 위에서 뒹굴고 있다. 창문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  그 고양이를 방에 들여놓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라도 하듯 창문을 열었다가 세게 닫았다.


저 눈발 속에서 나무들은 무엇으로 제 몸을 가리고 있을까?

유기견과 유기묘들이 골목에서 지하로, 창고에서 공터로, 천막으로 틈으로 쫓기는 이 시간 나는 공양하듯 내민 두 손을 감출 수밖에 없다.

비트코인 그래프가 화면 밖으로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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