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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Apr 07. 2024

불량품들의 사계

출소한 풀치가 준 만원 87

출소한 풀치가 준 만원



대파 싹이 돋았다. 언덕 위 살구나무도 곧 꽃망울이 잡히겠지.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고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고 있었다. 맥주 캔을 밟으려는 순간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길가에서 풀치가 마당 입구로 내려오고 있었다. 얼굴이 뽀얘지고 옷차림도 말끔했다. 풀치는 새 작업화를 신고 나타났다.     

“옴매 어디 갔다 왔어?”

 반가운 마음에 맥주 캔을 발로 밟다 말고 허리를 세웠다.

“아이고! 나는 죽었나 걱정했지. 요새 경찰차가 안 보여서 물어볼 길도 없고.”

“교도소에 있었어요.”

“뭐?”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다가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그래, 고생했네. 얼굴은 되게 좋아졌는디”

“그러니까요. 술만 안 마시면 살도 찌는데 안 마시면 제가 홱 돌잖아요?”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술잔을 입으로 터는 시늉을 했다.

“마시나 안 마시나 돌잖아. 인생은 알코올이지. 근데 돌사람 많다야. 나도 돌고 싶은디.”

나는 맞장구를 쳐줬다.

“누나가 술을 좋아한다고요?”

“한때는 내 종교가 알코올이었어.”

“저랑 술 한잔해요?”

“됐어. 폴리스 출동 시킬라고?”

풀치는 이가 빠진 입으로 피식 웃었다.

“누우나! 물어볼 말이 있어요.”

“그래 말해봐.”

나 아는 형이 내 이름으로 사업자를 내서 사업을 하다 망했어요. 제가 책임을 져야 한대요. 차용증은 받아 놨어요.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해요?”

“어떤 죽어서도 썩지 못할 놈이 그런 짓거리를 했대? 아무리 사기 칠 놈이 없다고 너한테 등쳐야?”

이 세상에 풀치보다 더 못난 놈이 또 있을까? 기가 막혔다. 한편으로 그자는 얼마나 지하 암반을 뚫고 기어 다닌 자였으면 컨테이너에 사는 풀치에게 그런 짓을 했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거는 아니지. 진짜 마빡을 굴 까는 조새로 조사 불 놈이네.”

나는 어릴 적 동네에서 쓰던 욕이 절로 터져 나올 만큼 분노했다. 욕이 심했다 싶어 얼른 마음 한쪽을 잡아당겼다. ‘같이 업되면 안 되느니라.’

“가만히 있어봐라. 방법이 있겄지. 그래, 다시 교도소로 가는 게 좋을 듯싶은디? 끼니때마다 밥 주고 걱정거리 없고. 무엇보다도 술 안 마신께 좋지 않으까?”

나는 짠하다 못해 화가 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것도 방법이라고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라고 하고 있었다.  

“.........”

언덕에 새싹들은 소리 지르고 풀치는 말이 없었다. 평상에 앉아 담배를 볼이 쏙 들어가도록 빨아들이다 앞산을 바라보았다. 마치 해탈한 사람 같았다.

“아따, 세상 참 뭐 같네.”

나는 풀치를 위로한답시고 하나 마나 한 말을 뱉어냈다.

“......”

풀치는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그는 취하지 않으면 별로 말이 없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 말뿐이 없다야.”

나는 풀치의 표정을 살폈다.

“누우나, 시집 냈다면서요? 한 권 얼마예요?”

“뭐? 그건 어디서 들었어?”

풀치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지폐를 꺼냈다. 만 원 한 장을 내게 건넸다. 속에서 물컹한 덩어리가 기도를 타고 올라왔다.

“지랄하시네, 돈은 너어두세요!”

풀치는 “고골 마을에 누나 시집 낸 소문이 다 났어”라고 했다. “시집은 안 가고 시집 냈어요?” 말을 하고 풀치는 웃었다. 출판기념회 날 고골 카페에 자리가 없어 사람들이 밖에 서 있었다. 입소문 날만도 했다.

나는 풀치 앞에 어정쩡하게 서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누나, 갑니다.”

송파경찰서에 가야 한다면서 풀치는 버스종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 좋아하는 연자방아도 그냥 지나쳤다.  

    

나는 풀치의 온기가 남은 만 원 한 장을 손에 쥔 채 마당에 서 있었다. 봄바람에 날리는 검불같이 좁은 그의 등이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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