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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Apr 23. 2024

불량품들의 사계

나무를 닮은 고골 사람들 93

나무를 닮은 고골 사람들



             

나무들은 물소리를 듣고 귀가 자란다. 나는 그 나무 아래에 서서 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들 노래를 듣는다.

식물들은 땅을 뚫고 나오면 수명을 다해 죽든 베이든 뽑히든 옴싹달싹 못하고 제자리에서 목숨을 다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다음 생에는 산속에서 혼자 서있는 나무가 되는 꿈을 꿨다. 사람들은 필요할 때도 불필요할 때도 나무를 가차 없이 베어버린다. 나무들이 잘려나갈 때마다 나는 전신에 통증이 인다. 나무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꿈, 그러나 꺾어지고 잘려나가는 나무들의 아픔까지 끌어안을 자신이 없다.  

한자리에서 오직 하늘을 향해 목숨을 지탱하는 나무들. 바람과 햇빛 아래 땅속 수천 가닥의 뿌리를 끌어안고 있는 나무의 꿈이 궁금하다.   

  

이곳이 세상 끝인 줄 아는 성길씨와 그의 구순이 다된 어머니,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자란 법화골의 원주민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무가 떠오른다. 남한산성 아래에 수세대를 살아온 그들의 뿌리는 어디까지 뻗어 있을까. 남한산성 법화골 인근의 산과 들 깊은 곳까지... 이곳으로 이사와 산 내 발밑에도 잔뿌리 몇 줄은 자랐을까, 내 발밑 또한 궁금해진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뒷산 산길에 늙은 뽕나무 가지들이 있다. 초여름이면 가지를 잡아당겨 오디를 따먹었다. 공터 옆 임자 없는 호두나무 아래서 호두를 줍기도 했다. 파란 대문 집 호두는 이 마을에서 제일 크다. 마을 끝 집 마당가에 진달래가 제일 먼저 분홍으로 변해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집에서 서너 발짝 더 가면 계곡 근처에 밤나무가 셀 수 없이 많지만, 길가에 서 있는 밤나무에서 떨어지는 밤이 제일 크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여럿이 어울려 밤을 주우러 갈 때는 그 나무로 먼저 간다. 봄날 머위는 절같이 생긴 3층 집 옆에서 가장 많이 자란다. 머위는 주인이 없는데 그곳에서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주인행세를 하는 사람이 있어 눈치를 살피곤 한다. 마을회관 옆에는 가시오가피 나무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나무 위치를 보아 자연 발생적으로 자란 것 같은데, 빌라 아저씨가 나무 주인행세를 톡톡히 하려 든다. 냉이와 쑥과 고들빼기는 뒷산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밭 언덕에서 많이 자란다.

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무성하게 뻗어 나가는 식물들의 잔뿌리가 어느새 내 안에도 가득 뿌리를 내려있다. 하남 교산 3기 신도시 재개발로 인해 나의 발이 뽑혀 다른 곳으로 쫓겨 간다 하더라도 나의 회귀성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서하남 농협 샘재 사거리에서 나의 집까지 3, 4키로 미터다. 어느 날 고향 친구 영순이가 서부농협 앞에 내려주고 갔다. 급한 일이 생긴 그녀들에게 얼른 가라고 하고 나는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삼월 초가 지났는데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눈발이 날렸다. 옷이 얇아 마을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정거장에 버스가 섰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기사였다. 인상을 살필 수가 없었다. 무조건 들이댔다.

“지갑을 안 가져 왔는디 나중에 차비를 줄텐게 태워 줄 수 있어요?”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집에 왔다.

외상 버스 타고 온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엄마 살아 계실 때 나한테 했던 말이 있다. “어쩌 니 몸에 달린 것은 안 잃어 불고 집에 오냐” 내가 병일 만큼 건망증이 심하다. 저 정도는 약과다

어느 날 종점에 일 보러 나왔다가 8041 버스를 보게 되었다. 차비가 퍼뜩 떠올랐다. 출발하려는 버스 엉덩이를 쳐서 세웠다.

“아따, 그날 고맙웠쏘.”

차비를 계산하고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는지 버스는 고개를 까닥거리더니 무심히 사라졌다. 나는 이미 이 동네에 스며들어 있었다.

집에 들어올 때 100번 마을 버스종점 고골 카페의 바둑이를 부르고 손을 흔든다. 고골 마스코트 바둑이는 어슬렁거리며 내게 걸어온다. 마을의 개들이 묶인 채 짖어댄다. 나는 개들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을 알고 있다.    

 

잠이 오지 않은 날에는 마당에서 서성거리다가 나무에 가만히 귀를 대본다.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나뭇가지 사이 별들이 허공에 손을 놓고 반짝거리고 있다. 언젠가 나무들은 뿌리가 뽑혀 트럭에 실려 갈 것이다.

나는 사각형 연속구조의 시멘트 박스에 내 세상을 담아두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의 고향은 흙냄새가 나는 두엄자리다. 나는 나무다. 고골 저수지의 나무들이 물속을 향해 거꾸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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