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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Jun 16. 2024

불량품들의 사계

모과나무의 부고 109

모과나무의 부고



                    

꽃들이 웅성거린다.

‘날씨 한 번 좋네.’ 산길을 걷다 자유로운 영혼 강아지 럭키를 만났다. 럭키는 겅중겅중 걸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럭키를 따라 걸었다.


산에 올라가는 초입에 공터가 있다.  빈터 앞에서 나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콧노래가 쏙 들어갔다. 주인이 사다리를 타고 나무의 우람한 팔을 자르고 있었다. 이 백 년은 족히 넘은 나무였다. 그동안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족구를 했었다.  가을이면 공터에 밤이 그야말로 우박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밤을 주우면 강아지 산이랑 나무 그늘에서 놀았었다.   


산에 오르는 것을 멈추고 전기톱이 생나무 가지를 토막 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무가 잘려나가 나뒹굴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 이사 오기 전 방이동 살 때의 모과나무와 목련이 생각났다.     


송파 방이사거리에 9호선 전철역이 들어선다는 정부 발표가 났을 때다. 전철 들어선다고 도로를 파헤쳐 가로수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나무 수난 시대였다. 곧바로 방이시장 뒤, 골목에 단독주택과 낡은 다세대가 철거되고 빌라가 들어섰다. 내가 방이동으로 이사 올 때 만 해도 감나무, 목련, 모과, 포도나무들이 집마다 한 그루 이상은 있었다.     

집 바로 옆에 유치원이 있었다. 조그만 운동장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와 단풍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어느 날 나무들을 베어내고 주차장을 만들었다.


내 집 맞은편 주택 마당에 모과나무가 서 있었다. 우측으로 다세대 주택 화단에 봄마다 목련이 활짝 피어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두 집은 철거되지 않았다. 나는 그때 가게 월세가 밀려 냄비 속 깨구락지처럼 주인한테 볶이고 있었다. 가게 일이 끝나면 목련과 모과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밤 골목을 지나다녔다.

“안녕, 목련 모과, 느그들은 골목을 지켜야 해.”  

“알았어, 걱정 마.”

어쩌면 나는 나보다 더 위태로운 나무에 기대고 있었는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것은 벼랑 끝에서 같이 뛰어내리는 것일까, 버티는 것일까.

어느 봄날 화장지 한 묶음이 사 층 내 집 문 앞에 놓여있었다. 공사하면 소음 때문에 이런 것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친구한테 들은 적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베란다에 갖다 놓았다.

다음날 새벽부터 망치 소리와 포클레인 소리가 참새 울음보다 먼저 골목을 흔들었다. 집에서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목련이 있는 다세대 주택을 부수고 있었다. 떼로 뭉쳐있는 목련은 아직 잘리지 않았다.

‘살려두려고 아직 자르지 않았겄지.’

그날 딱 부러지는 성격의 동생 정선이가 집에 놀러 왔었다. 산이랑 산책하려고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갔다.

목련은 그사이에 뿌리가 뽑혀 몸통이 잘린 채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세상에 우리 집 화단에 심으면 되는디 ”

“진즉 말했으면 갖다 심었지요.”

그때였다. 파란 하늘에서 빗방울이 갑자기 떨어졌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곧 벼락 치겄네.”

인부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인부들에게 손바닥으로 받은 빗방울을 보여줬다. 인부들은 나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정선이는 저만치 물러났다. 나는 얼른 맞은편 모과나무를 쳐다보았다. ‘전기톱으로 짜르는 것을 다 보았을 텐디’ 지금 얼마나 떨고 있을까.

나무에 톱을 들이댄 뒤 현미경으로 보면 나무가 미세하게 떤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이 어찌 공포와 아픔을 모를까.


나무는 먼 곳으로부터 봄을 끌고 와 자신의 생기로 사람들의 순한 저녁을 맞게 해 준다.

사람들은 나무를 보고 그동안 걸치고 있던 계절 하나를 벗는다.

나무들이 아래쪽을 향해 촉수를 드리우는 침묵에 등을 기대면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한밤중 집에 들어갈 때마다 모과나무에 말을 걸었다.

“여태 주인이 집을 뿌수지 않는 걸 보면 넌 괜찮을 거 같어!”

나는 말이 없는 모과나무의 속을 알 수가 없지만, 그가 흘려보내던 보랏빛을 뚜렷이 기억한다. 손도 눈도 둘 곳 없던 나처럼 그해 봄 모과는 꽃을 피우지 않았다. 무서워서 꽃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봄이었다. 다행히 다음 해에 꽃이 피고 어른 주먹보다 모과가 크게 열었다. 내가 산 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모과나무는 무사했다.

     

나는 강아지 산이를 떠난 보낸 뒤로 방이동 근처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밭에 물 줄 고무호스를 사러 방이시장에 가야만 했다. 언제까지 산이 기억을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내가 전에 살던 집 근처에 차를 주차하려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갑자기 명치끝이 아려왔다. 멀리서 봐도 모과나무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5층짜리 빌라가 들어서 있었다. 호스를 사자마자 나는 이 싸늘한 골목을 최대한 빨리 벗어났다

              

나는 잎사귀를 달고

쓰러져 가는 나무들을 위해

꽃잎 한 장 불에 태운다

죽은 자가 산자를 위해

곰팡이 핀 입술에 밥 한술 떠먹이는 시간이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빈터 주인은 뿌리를 파내고 가지들을 마당 끝에 쌓아놓았다.

“나무는 왜 잘랐어요?”

“밭 만들려고요.”


집주인은 이리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다.  집을 꾸미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무 나이테를 세다가 내려왔다.


저녁을 먹다가 나무들이 흘린 흰 피로 밥을 짓고 불을 밝히던 그시절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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