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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Dec 03. 2024

불량품들의 사계

술 보다 깊은 정 154

술보다 깊은 정 



         

하늘이 아이 얼굴 같다. 그 하늘 아래 풀치랑 나랑 평상에 나란히 앉아 앞산을 바라보고 있다.

풀치는 술도 안 마셨는데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말을 꺼냈다.

" 단풍, 이쁘다. ”

“지금 단풍이 문제예요! 성길이 형 진짜 짠돌이예요.”

“술도 안 마시고 먼 소리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받아서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 헐람시러.”

“이 만 원 준다 해 놓고 만 원만 주잖아요.”

“밑도 끝도 없이 먼 말이여.”  

   

사연인즉, 추석 전날 일이었다. 풀치는 그날 일을 여태 가슴에 담고 있었다. 성길씨를 하남 신장시장에서 우연히 만났단다.

성길씨가 풀치에게 시장 본 짐을 들어주면 이만 원을 주기로 했다. 성길씨는 풀치의 손에 무거운 짐은 들게 하고, 풀치를 도로에 세워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오만 군데 들러 몇 시간을 데리고 다녔다. 성길씨는 점심도 사 주지 않으며 잠바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돈이 없네. 만 원만 받아. 성길이 형이 내게 이러는 거예요.”

“정말?”

“내가 어지간하면 점심을 먹자고 하려다 때려치웠어요.”

평소 성길씨는 시장 볼 때마다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었다. 아마 그날은 내가 외출했었나 보다.    

  

이 일이 있기 전 이런 일도 있었다.

“이번 달은 아저씨가 사료 사주쑈.”

“고양이 이뻐한 옆집이 알아서 하세요.”

성길씨는 너럭바위에 앉아 소주 병나발을 불고 있는 풀치에게 눈을 돌렸다. 풀치에게 사달라고 하라는 뜻이었다.

‘에라, 짠돌씨, 세상에 술주정뱅이가 돈이 어디 있다고.’

풀치는 우리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풀치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가 마당을 시끄럽게 했다. 호두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참새도 날아가버렸다.

‘내가 알바 해서 성길씨 고양이 밥 사고, 월세 내고 먼 집주인이 저래’ 들리듯 말 듯 구시렁거렸다. 나는 성길씨가 들었으면 하고 한마디 더 했다.  

아무리 내 집에 와서 자고 나간다지만 내 고양이가 아니다. 성길씨 고양인데 저렇게 생까다니. 그때 눈을 끔벅거리며 너럭바위에 앉아 있던 풀치 귀가 번쩍 열려 내 말을 들었다.

“누님, 그거 얼마예요?”

“왜 니가 물어봐.”

“내가 사 줄 께요. 그까짓 거.”

“됐어, 니 돈은 돈 아니냐?”

성길씨는 ‘쟤가 사 준다 잖아요’ 표정을 지었다.     

풀치는 평상시 같으면 해가 져도 집에 가지 않는다. 그날은 무슨 일로 비틀거리는 오발탄처럼 종점으로 내려갔다. 풀치는 곧바로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동물 사료 가게를 알아봤다고 나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 날 우리 집 마당에서 셋이 만나 사료를 사러 갔다. 처음으로 풀치가 내 차를 타는 날이기도 했다. 성길씨가 뒷좌석에 탔다. 자연스럽게 풀치가 조수석에 탔다. 앞니가 없는 풀치는 함박꽃처럼 웃었다. 나도 풀치를 보고 따라 웃었다. 그 웃음도 잠시. 성길씨는 사룟값을 보탤 생각이 전혀 없구나, 직감했다. 낼 생각이 있으면 조수석에 탔을 텐데. 쉽게 말해 나서고 싶지가 않다는 뜻이다. 풀치는 그런 든 지 말든지, 풀치의 목적은 사료를 사고 난 후 밥 먹고 셋이 동묘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동묘를 간 적 없어 궁금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셋은 좋은 그림이 아니었다. 결혼도 못 한 유통기한 넘은 불량품 셋이 돌아다니면 우리가 오히려 사람들 구경거리가 될 것 같았다.

성길씨는 사료 가게 안 출입구에 서 있었다. 풀치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가게 안을 갈고 다녔다.

“누님, 품질 최고로 좋은 것 사세요.”

“털 안 빠지는 거 살라고.”

성길씨는 풀치가 계산대로 오자 밖으로 나갔다. 풀치는 현금으로 사만 원을 계산했다. 계산을 끝낸 풀치는 나에게 동묘에 가면 신발도 사 주고 브로치도 사 주겠다면서 가자고 졸랐다. 사료 사 준 것은 사 준 것이고, 나는 미안하지만, 그 눈빛을 싹둑 잘랐다. 둘이 신장시장에 내려주고 나는 집으로 왔다. 성길씨랑 풀치랑 둘이서 점심 먹고 동묘에 갔다.  

    

성길씨랑 동묘 갈 때 차로 데려다가 준 일이 생각나 내가 풀치에게 물었다.

“그날 동묘 간 날 점심값 누가 냈어?”

“해장국 먹고 내가 냈지요.”

“염전이구먼.”

“이제 같이 안 다닐라고요.”  

   

풀치가 나에게 성길씨가 짠돌이라고 하소연한 지 며칠 지났다. 성길씨가 아침 일찍 마당에서 담배를 태우며 나에게 말했다.

풀치를 신장동 시장에서 우연히 만나 순댓국을 사줬는데 기어이 소주를 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풀치가 식당에서 넘어지며 반찬을 엎어 결국은 식당 주인한테 둘이 쫓겨났다고 했다.  

“이제 풀치 다시는 안 볼라고요.”

성길씨는 담배를 끄며 말했다.  

   

그러나 오늘 성길씨와 풀치는 등산복을 입고 동묘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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