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모래 알갱이는 뭉치지 않는다. 못한다. 서로를 붙어 있게 하려면 물이라도 필요하다. 그 자체만으론 불가능하다. 알고 있음에도 물을 떠 오기 귀찮았기에 그는 억지로 방법을 떠올렸다. 거짓말이라는 수단은 생각보다 효과가 괜찮았다. 모래는 나름 견고하게 뭉쳐졌다. 자그마한 성을 쌓는 것까지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을 때, 그는 물을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주위에 삐쭉삐쭉 쌓여진 것들이 제법 숫자를 채워가지자 자신감이 생겼다. 더욱 높고 커다란 것을 꿈꾸게 되었다. 저 멀리 웅장한 성들을 가진 친구들이 보이자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여겼다. 거짓말이 지닌 원초적 한계에 대해 우려는 되었지만 이제와 물을 뜨러 가는 귀찮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노력 없이 뱉어낸 거짓말로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 높이가 쌓이자 예상치 못한 균열이 조금씩 생겨났다. 새로운 거짓말을 불어넣어 가며 억지로 보수를 해두고 계속 쌓아갔다. 커다란 파도만 오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라 그렇게 안심하며 이어갔다.
"지랄하지 마 이 새끼야"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서 정겨운 욕설이 오간다. 깨복쟁이 시절부터 이어진 녀석들이다. 주목적은 다음 달에 결혼할 친구의 청첩장 배포였지만, 어느새 우리들의 추억나누기로 주객이 전도되었다. 일주일에 7번을 만나던 어린 시절은 이미 아련해진 옛날이야기로 흘러갔고, 요즘은 1년에 한두 번 만나기도 힘든 녀석들도 있다. 각자의 생활에서 친구의 비중이 줄어들고 일상에서 언급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이런 순간엔 사회적 가면을 모두 벗어두고 유치하고 멍청하며 격 없는 바보들로 돌아간다. 마음속 품어둔 친구라는 단어가 짙어지며 강렬한 향취를 뿜는다. 부딪치는 잔 소리는 최면처럼 한 살씩 한 살씩 나이를 내려가게 만든다. 결국 중학생 소년들만이 소주를 연거푸 들이켠다. 적당히 마시려고 했는데 이미 글러먹은 분위기다. 내일 눈을 뜨면 기억이 어느 정도 날아갈지 걱정은 남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참으로 어렵다. 두 세계의 충돌, 융합. 서로를 허락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른이 될수록 복잡하다. 서로의 조건이 조율되지 않는 상태에서 강제로 맺어진 어린 시절 친구들은 어쩌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다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일 것이다. 한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라는 논리를 철저히 부정하긴 하지만, 한 번의 허가를 거쳐 이어진 친구라는 존재에겐 나의 허들은 많이 내려가고 수많은 부정적인 것들이 참아질 수 있다. 내가 친구라 부르는 지금의 친구들은 더 이상 숫자의 변동이 없길 바란다.
참는다, 아니면 참아준다. 그렇게 이해하고 눈 감고 넘어간 시간들이 쌓이다 결국 끝이 나버렸다. 마지막까지 엮여있던 가느다란 실 한가닥이 종국엔 '툭'하는 가벼운 효과음과 함께 끊어졌다. 모르겠다. 이미 끊겠다 마음먹은 거였을지도. 지극히 사소했던 모든 것들은 다 모아보니 태평양의 쓰레기섬처럼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준다. 나는 이제 널 잘라냈다. 내가 이해할 필요도 받아줄 필요도 없다, 존재에 대한 벽을 쌓고 차단하자 엮여있던 감정들이 함께 쓸려간다. 이제 어떠한 감정도 남지 않았다. 빌어먹을 시간의 찌꺼기들은 어쩔 수 없지만 의식할 필요도 없게 된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으로 친구의 수를 하나 줄였다. 더 이상 줄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애정이 아닌 호기심의 영역으로 넘어가서 계속 생각해 본다. 떠올린다.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발생된 상황일지에 대해 연구한다. 전혀 다른 로직으로 짜여진 너의 머리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고민한다. 모든 이란 말이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없음이 안타깝지만 괜찮다. 아님 말고이기에 별 걱정 없다. 나의 방식으로 추리 가능한 모든 경로를 예측해본다. 다음번 술자리의 안주로 취급하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의 잔재는 이렇게 써먹을만하다. 재밌는 이야기로.
속이기 위해 뱉던 거짓말이 너무나도 많아지니까 결국 들킨다. 진짜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확인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의심받아도 그 순간에 헤헤하며 넘어가면 될 줄 알았겠지. 사소함을 사소하게 여길 거라고 믿었을 테니까. 어쩌면 그런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익어버린 것이다. 내뱉는 것에 아무런 대처가 없으며 후가 없다. 잦은 그것이 습관이 되었고 버릇이 되었으며 '내'가 돼버린 사실을 다른 이들이 짚어주고야 눈치챈다. 쌓아온 거대한 모래성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모래 사이에 뿌려둔 거짓말들이 점차 말라가며 흩어지려 한다. 거센 바람이 들이치며 그 속도를 더 가속화시킨다. 다시 억지로 붙이려 거짓말을 더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나는 이미 먼발치로 떨어졌다. 아등바등 거리는 너를 바라보며 무슨 감정을 떠올릴까. 통쾌하거나 고소하거나 안타깝거나. 그런 감정이 떠올랐다면 다시 널 도우러 다가가겠지만 늦었다. 나는 감정이 아닌 생각만 남는다. 내가 맞았다는 분석 결과만이 나의 모래성을 반짝이게 만든다. 타인의 무너지는 모래성을 보는 것은 아무런 감정이 없다. 그냥 사실로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