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안 빠졌어?"
엄마의 걱정스런 물음은 괜스레 짜증만 일으켰다. 밥을 크게 한 덩이 떠서 꿀떡 넘겨도 봤고, 캭캭 거리며 가래를 뱉어내듯 애도 써봤지만 가시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엄마가 해둔 매운탕은 죄가 없었다. 알면서도 그랬다. 아주 얇은 잔가시 하나가 목구멍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묘한 간지러움과 고통 사이 어딘가쯤에 위치한 감각은 은근한 괴롭힘을 가한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오래도 버티고 있었다. 그런 불편함이 이어진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나의 기분을 대변하듯 전화기는 신경질을 내며 요란하게 울었다.
한강에서 중랑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가를 보며 잠기는 스스로를 건져 올린다. 당연한 날이었다.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원하던 그 순간이, 하루라도 빨리 다가오길 기대했었다. 그렇게 당연함을 당면한 나는 자연스럽지 못한 동요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한 기쁨과 행복을 비는 마음은 한치의 속임 없는 진심. 다만 거슬린 것은 내려놓아도 된다는 당위로 점철된 안도였다.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이었을까?
아주 오래는 아니셨다. 할머니의 마지막은 죽은 채로 연명한 시간들이었다. 치매를 포함한 노환들은 자연스럽게 찾아왔고, 그녀는 막내딸의 집에서 병상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 검은 정장을 걸치고 최대한 어두운 넥타이를 찾았다. 넥타이를 강하게 조이면 혹시 가시가 빠지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잠깐 스쳤다. 준비를 마치고 장례식장으로 출발하는 순간까지도 가시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박혀있었다.
파란색 재킷과 하얀 바지, 갈색 구두를 또각이며 들어섰다. 조금 이르게 도착했나 싶었지만 이미 복도는 축하인파로 바글거렸다. 하객들의 웅성임과 적당한 해가 잘 어우러졌다. 신부대기실에 가서 미리 인사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떠한 표정으로 그 공간에 서있었을지 궁금하다. 내 발걸음은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우리 할머니는 7남매의 엄마였다. 가족친지만 해도 그 수가 이미 충분했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방문한 손님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얼굴을 자주 본 친척, 얼굴이 가물가물한 친척, 얼굴을 모르겠는 친척들과의 인사가 지속됐다. 안부를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대화도 이어가고 육개장에 수육까지 먹었는데도 가시는 여전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생선을 굳이 왜 먹었을까 하는 후회까지 들었다. 담배연기가 생선가시를 녹여주길 바랐다. 그럴 리 없지만 말이다.
어깨를 훤히 드러낸 것이 이뻤다. 다른 결혼식에서 보던 드레스들보다 길이가 짧은 편이었다. 역시 누나스러웠다. 버진로드를 걷는 누나의 표정은 어울리지 않게 약간은 긴장한 듯했다. 알아차리지 못할 무언의 응원을 전했다. 고대하던 순간은 온전한 순수의 기쁨이었다. 내가 받은 것도, 주고픈 것도 같았다. 마중 나온 신랑의 손을 잡는 누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고, 나도 따라서 웃었다.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기 전에 뒤돌아 식장을 나섰다.
염을 마친 할머니를 보러 들어갔다. 고모들의 통곡과 손주들의 눈물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알렸다. 나의 눈은 메말랐지만, 할머니가 차려주던 고봉밥을 이제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때쯤, 지긋하게 괴롭히던 가시가 드디어 빠졌다.
"왔으면 누나 보고 가지 왜 그냥 갔어"
"난 누나 보고 왔지"
장난치지 말라며 웃는 누나의 목소리가 맑았다. 신혼여행 다녀와서 보자는 인사와 함께 통화를 마쳤다. 한 번에 마칠 수는 없었지만, 확실하게 마침으로 향해갔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