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한남대교 남단 구간을 통과하여 동작대교 남단 즈음에 다다르자 서서히 속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말 늦은 오후 시간에 올림픽대로를 통과한다는 게 고행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점차 정체가 풀리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을 때 눈앞에 드러나는 풍경이 순식간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석양이 여의도 63 빌딩 바로 뒤에 수줍게 얼굴을 감추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찾았다. 전방을 주시하면서도 이 찰나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자 셔터를 계속 눌러 댔다. 내 차 속도가 많이 떨어졌는지 뒤따라오던 차들이 계속 빵빵거리며 빨리 가라고 채근 댔지만 난 이 순간을 어떻게 든 카메라에 담고 심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랜만에 포착하게 된 ‘Magic Moment’였다.
'매직 모멘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다. 그는 1952년에 출간된 책 'The Decisive Moment'에서 '매직 모멘트'는 "인간의 행동과 환경과의 조화가 절묘한 순간"이라고 정의했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매직 모멘트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매직 모멘트를 포착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열어 놓고 자신의 카메라를 움켜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직 모멘트는 사진작가에게만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매직 모멘트가 몇 개씩은 있을 것이다. 살면서 뜻밖에 만나는 마법 같은 순간 즉, 매직 모멘트는 우리에게 무한한 행복감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동기 부여와 영감을 주기도 한다.
내가 머릿속에 소장하고 있는 매직 모멘트는 3가지가 있다.
첫 번째 매직 모멘트는 내 아들이 선물해 준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아들이 돌을 갓 지난 때였다. 애기 엄마는 대학원 시험 준비한다고 매일같이 학교에 나가야 하는 바람에 낮에 아들을 돌보는 일은 항상 내 몫이었다. 그 당시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 준비 때문에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서 틈틈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평상시 하던 대로 아이를 거실에서 보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리저리 기어 다니면서 놀던 아들이 소파 근처에서 장난감을 툭툭 치면서 놀다가 갑자기 낑낑대면서 소파를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혹시 넘어지면 잡아주려고 일어서서 아들이 있는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 녀석이 갑자기 소파 언저리를 잡고 벌떡 일어서더니 한 발짝 두 발짝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빠~ 빠~” 하면서 내가 서있는 쪽으로 서 너 발자국 걸어오더니 나한테 포옥 안기는 거였다. 순간 너무 기쁘고 흥분해서 아들을 꼬옥 안아주는데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그렁그렁 눈가에 맺혔다. 첫걸음마를 내 앞에서 제대로 멋지게 해낸 순간이었다. 몇십 년 전의 일인데도 지금 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또렷한 마법의 순간이었다.
두 번째 매직 모멘트는 2002년 초에 아프리카 촬영을 가서 만난 마법의 순간이었다.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에 있는 다리 위에서 퍼포먼스 하는 영상을 찍기 위해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갔던 때 일이다. 짐바브웨와 잠비아 두나라를 잇는 빅토리아 폭포 다리 중간 지점에서 철제 드럼통을 가지고 다섯 명의 출연자가 퍼커션 연주를 하는 장면을 찍는 프로젝트였다. 헬기 촬영을 위해 남아공에서 건너온 헬기 조종사와 마운트 장비 엔지니어를 잠비아 쪽 헬기 계류장에서 만났고, 우리는 곧바로 카메라 세팅을 하고 감독과 함께 나는 헬기에 올라섰다.
헬기를 타고 점점 위로 올라가니 빅토리아 폭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목표했던 지점에 이르러 빅토리아 폭포 전경을 내려다본 순간, 내 입에서는 “와~~!!”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장관에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물안개와 햇빛이 만나서 연출해 내는 수십 가지의 크고 작은 무지개들, 그리고 정글 숲과 엄청난 크기의 폭포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조합은 말 그대로 압권이었다.
우리는 좀 더 멋진 풍광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going down a little more~!!”를 계속 외쳐 댔다. 헬기가 폭포를 따라 조금씩 내려가나 싶더니 베테랑 헬기 조종사가 “더 이상 내려가면 위험하다”라고 경고를 하면서 아래를 쳐다보라며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전선같이 보이는 줄이 우리가 타고 있던 헬기 바로 아래 뚜렷이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헬기 조종사에게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폭포 주변에 조명탑과 연결된 전선이 이곳저곳에 많이 설치되어 있어서 아래로 내려가면 위험하다고 설명해 주는 거였다. 우리는 압도적인 자연 풍광과 촬영에만 몰두하다가 말 그대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곡예비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면서 두 번 다시 경험하기 힘든 아찔한 순간과 놀라운 풍광이 교차되는 매직모멘트였다.
세 번째 매직 모멘트는 2016년 겨울 어느 날 경험한 놀라운 순간이었다. 날짜도 정확히 기억한다.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 19일 토요일 저녁이었다. 매번 뉴스로만 보다가 나 또한 역사적인 순간에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한 날이었다.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 내려서 가까스로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 태어나서 여태껏 그 많은 사람들의 물결과 함성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우리 모두는 정말 깜짝 놀랐다.
사람들에 떠밀리다가 우리는 겨우 틈새를 찾아 자리를 잡았고, 다 같이 노래 부르고 구호도 외치며 1시간 남짓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촛불집회에 온전히 빠져들었다.
사람들의 열정과 함성이 만들어 낸 감동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매직 모멘트였다.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
우리는 순간에 찍히는 사진과 같은 생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생의 각 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과 바꿔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때로는 오직 그 순간에만 온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_ 앙드레지드 『지상의 양식』中
마법 같은 순간은 우연히 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필연적으로 오기도 한다.
메인 사진 : Unsplash의 Jakob Owe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