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왓츠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우리는 가끔 오해와 소문에 휩싸여 억울한 실수를 저지르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다 더 큰 문제에 빠지기도 한다. 영화 속 피터 파커도 바로 그런 상황 겪는다. 그동안 하이틴 드라마 속 주인공이었던 그에게 더 이상 소년의 천진난만함은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고 상황만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섣부른 수습은 예기치 않은 불행을 불러오고 결국 불가피한 희생을 낳는다. 준비되지 않는 이별은 그의 삶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놨다.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로. 더 이상 마법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도, 타인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바로잡는 일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되는 일은 당장 눈앞의 상대에게 분개하는 일이다. 그래. 적을 무찌르고 정의를 실현하며 세상을 지키는 건 히어로의 공식이지 않은가. 그들을 짓밟아 강렬한 쾌감을 선사해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니깐. 그러나 영화는 히어로 무비의 기존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들이 등장하여 피터를 막아 세운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를 제시한다. 놀랍게도 그 기회는 피터에게만 주어지지 않는다. 스파이더맨의 적들에게, 그들의 불행한 과거와 선택에 대해서도 기회가 주어진다.
여태껏 톰 홀랜드는 적들을 재치 있게 제압하고 농담처럼 용서해 왔다. 본능적으로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영웅에게 선의란 얼마나 당연한가. 스파이더맨은 이웃들의 사랑을 받고 언제나 그들을 지키는 존재다. 하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빌런들은 어떨까. 사실 그들도 능력자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히어로와 같을지 모른다. 그들 또한 한때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길을 잃고 좌절한 끝에 스스로를 악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저 악의 화신으로 그려지지만은 않는다. 단순히 악한 존재가 아니라 방황하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세상에서 소외되었으며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히어로와 빌런은 똑같이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한쪽은 고통 속에서 바른 길을 선택했고 다른 쪽은 고통에 휩쓸려 악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한 악이 아닌 실패한 선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불행하게 악하며 우리의 연약한 마음 또한 언제든지 악해질 수 있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영웅은 늘 악당들이 세상에 동화될 수도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선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왠지 지나친 낙관 같다. 그건 마치 병든 이에게 주사 한 방에 모든 게 치유된다는 말처럼 허황되게 들린다. 고통은 너무나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외부에서 이를 해결하기란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바로 기회를 주는 거다.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선의는 강요할 수 없지만 두 번째 기회를 줄 수 있는 건 우리의 몫이다. 세상 속에서 방향을 잃은 사람들이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배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지 않을까.
스파이더맨도 가족을 잃고 절망 속에서 돌아갈 길을 잃었지만 친구들이 보여준 연대와 위로 덕분에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나눈 아픔은 피터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고, 비록 모두가 그를 잊어버렸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남았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도시의 이웃들을 돕는 길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단순히 영웅의 길이 아니라 상처 속에서도 선한 마음을 잃지 않겠다는 결단이자 스스로에게 주는 두 번째 기회였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이모에게서 물려받은 가르침이 아닌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 깨달은 신념이 되었다. 아무도 그의 성장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원래 깨달음은 늘 보이지 않게 자리한다. 그걸 지켜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이 그를 끝없이 괴롭히겠지. 허나 그 물음표들은 그의 문장 끝에 단단한 지축처럼 자리 잡을 것이다. 회전축이 기울어져도 지구가 계속 도는 것처럼 피터 역시 멈추지 않을 거다. 더이상 외로움은 그에게 형벌이 아니다. 되려 분리된 자신을 봉합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도심을 종횡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낡은 아파트의 작은 방. 창틀의 먼지를 쓸어내며 새롭게 비상하는 피터에게 신념은 그 어떤 슈트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나 역시 “다시 한번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잘할 텐데”라는 후회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완벽한 히어로보단 미숙한 악당들에게 연민을 느꼈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실패를 사랑하게 됐다. 이상하게도 그들이 영웅을 이기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좋았다. 분노와 질투 같은 감정에서 오히려 위안과 공감을 얻고 나쁜 쪽으로 더 마음이 움직였다. 어쩌면 내 어리석은 실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 자신을 그들에게 투영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악당들도 영웅이 될 수 있다면. 그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어떨까. 만약 그렇다면 왠지 나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내가 놓쳐온 수많은 곳들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겠지만, 지금 이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 다가올 기회는 온전히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