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제법 차가워 코끝이 시린 날이다. 종종걸음으로 집에 들어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풀리고 그제야 집이라는 포근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실까 하다 귤을 꺼내 들었다. 앉은자리에서 연달아 4개를 까먹고 노래진 손 끝을 물로 씻어낸다.
오늘도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 책상에 앉을 채비를 한다. 여기서 '책상에 앉을 채비'란 별의별 일을 다 포함하는데, 물을 마시고, 멀쩡한 옷을 다시 갈아입고, 괜히 스트레칭도 하고, 깨끗한 책상 위를 한번 더 각 잡아 정리하는 등이 이에 해당한다. 준비운동만 한 세월이라는 뜻이다.
드디어 앉았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괜히 브런치나 유튜브를 오가며 한참 시간을 보낸다. 사실 한참 이랄것도 없다. 내겐 눈 깜짝할 순간들 이니까.
심호흡을 한 뒤 브런치의 '글쓰기' 아이콘을 누른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놀려보지만 오늘따라 영 머리가 돌아가질 않아 그 어떤 소재도 떠오르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기도 하고, 고개를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 매일 쓰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는데 왜 나는 이 순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가... 아, 생각해 보니 커피를 깜빡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커피바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불을 켜고 원두를 수납장에서 꺼내 딱 18g을 간다. 데워진 포터필터에 곱게 갈린 원두를 담고 34초 동안 36g의 커피를 추출한다. 커피 추출은 온도나 습도에 영향을 받는데 나는 깊게 파고들만큼 분석적인 편은 아니며 유연한 마음으로 커피를 대하려고 한다. 그래서 날마다 달라도 그리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다.
오늘은 크레마가 진하니 라테를 만들기로 마음을 먹고 피처에 우유 160g을 담아 스팀을 친다. 롤링이 잘 돼서 폼이 예쁘다. 에스프레소가 담긴 커피잔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에 피처를 잡아 천천히 라떼아트를 시도해 본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지만 잘 되든 못 되든 흥분하면 안 된다. 피처를 거두어 다 끝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지만 예쁜 모양의 라테를 만들 수 있다.
오늘은 2단 하트에서 끝났다. 사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뭐 그럭저럭 만족이다. 책상에 들고 와 인증샷도 하나 남긴다. 그리고 앉아서 맛을 보는데 부드러운 우유 거품에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금세 바닥이 보인다. 속은 따끈한데 정신은 또렷하다. 책상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얹으니 갑자기 손가락이 날아다닌다.
이건 내가 쓰는 게 아니다.
바로 커피가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