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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각인된 나의 한 해(by. 못골)

#26. 내가 꼽는 한국사의 한 장면

by 땡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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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우리 역사 속의 한 장면은 1987년의 일이다.
그해에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1월 14일 -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도중 사망하다.
4월 13일 - 전두환 대통령 4·13호헌 조치 발표하다.
6월 9일 6월 항쟁 도중 연세대 학생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다.
6월 10일 - 이른바 6·10항쟁이 전국에서 물결치다.
6월 29일 - 노태우가 6·29 선언 발표하다.
7월 15일 - 태풍 셀마가 상륙하다.
8월 19일 - 전국 95개 대학교의 학생들, 충남대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전대협) 결성하다.
8월 29일 - 오대양 용인 공장서 박순자 사장 등 32명이 집단 자살한 변사체로 발견되다.
9월 29일 -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 대통령 후보 단일화 회담 결렬되다.
10월 12일 - 국회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가결시키다.
10월 29일 - 헌법 제10호(제9차 개정 헌법)가 공포되었다. (1988년 2월 25일 시행)
11월 29일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탑승객 115명 전원 사망하다.
12월 16일 -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민주화 열기로 뜨겁던 그해 국내 팝송은 커팅 크루의 ‘(I Just) Died In Your Arms’가 가장 인기가 높았다. 기대에 부풀어 곧 올 듯 바라던 현실이, 아득히 멀어져 버리며 다가온 좌절을 표현한 노래 가사가 당시 상황과 맞닿아 있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 때문에 끊임없이 국민의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1986년 6월 부천서에서 저질러진 문귀동의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은 화약에 불을 지핀 꼴이 되어 전국이 시위로 이어졌다. 이듬해 1987년은 사건에 사건이 연속되어 어느 해 보다 소용돌이친 한 해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은 일상적이고 전국적이었다.




1987년 1월은 책상을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한 해가 시작되었다. 박종철 고문 살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젊은 대학생이 물고문으로 죽다니….’하며 모든 국민이 충격받았다. 성고문, 물고문 같은 문명사회에서 일어날 수 없는 야만적인 사건으로 인해 시작된 연이은 시위는 전국을 전쟁터로 변화시켰다. 체육관에 모여서 형식적으로 선출하는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개헌 요구가 쏟아져 나왔다.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 조처를 발표하여 대응했다. 연일 시위가 더 격화되었다.





나는 졸업 후 5년의 공백기를 거쳐 겨우 학교 사회로 진입한 2년 차 교사였다. 그즈음 임용되기 전 갖고 있던 학교 사회에 대한 환상이 많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학재단의 족벌 운영, 육성회 찬조금 강제징수, 교재 채택료 비리, 수학여행 리베이트 등 잘못된 학사운영과 크고 작은 여러 재정 비리가 만연해 있었다. 많은 부조리와 함께 군대 생활처럼 숨 막히는 위계질서는 학교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깊게 했다.




학원에서 강사를 하던 친구가 학교에 영어 교사 면접 후 그는 교장과의 면담에서 숨이 막혀 질식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학교로 들어오는 것을 그만두고 학원계에 남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학교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 처음으로 외출 나가는 사병처럼 느껴져 군 복무를 다시 하는 것 같았다. 강의한 시간만큼 수당을 받아 가는 학원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더 부조리 없는 깨끗한 배움의 장으로 생각되었다. 심리적 아노미 상태였다.




그해 5월, 내게 아침 직원회의에서 교사들에게 연수를 하라는 학교장의 지시가 내려졌다. 4.13 호헌 조처를 거부하고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연수였다. 내 생각에 배반되는 연수자료를 직원들을 대상으로 읽어 나갔다. 참담하였다. 교원은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정당 가입이 되지 않고,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며 노조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정권이 바뀌면 가장 먼저 변화를 느끼는 곳이 학교이다. 그만큼 학교는 정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집권당이 바뀌면 학교 분위기도 즉시 달라진다. 초등학교 때 외운 혁명 공약, 고등학교 때 맞아가며 체육 시간에 외운 국민교육헌장은 지금도 기억 속에 각인 되어있다. 정통성 없는 국가 권력은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입하기 위해 어용적인 선언문을 암송하도록 학생들에게 강제했다.




학교는 수적으로 구성원이 가장 많은 조직체이다. 교육기관인 학교 현장이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할까 싶어 정치적 색채를 억지로 탈색시켜 버렸다.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워 정당 가입을 지금도 금지하고 있다. OECD 가입국 중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정의당에 후원금을 낸 교사를 색출하여 이명박 정권은 징계의 빌미로 삼기도 했다. 정치적 중립성의 유지는 대외적인 명분일 뿐 새로 정권이 바뀌면 입시제도, 교육과정, 교원 선발제도, 교과서 제도 등 여러 부분이 정권의 입맛에 맞게 변화한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해 주어야 할 정부는 오히려 지키지 않으면서 교사에게만 참정권을 제한하는 규범이다.





신념을 행동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배반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집회 현장에 참여하였다가 장학사에게 사진 채증이 되면 집회의 합법 여부와 무관하게 학교로 장학사가 찾아와 경위서를 요청했다. 징계의 빌미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대통령 지시 사항’이라는 지침이 정기적으로 내려왔다. 현장에서 학생들이나 교사를 대상으로 지침에 맞는 사업을 시행하고 그 근거로 학기별 일지를 작성하여 보고하는 업무였다. 100%의 거짓말 작성이었다. 물론 거짓인지 관리자도 알고 있었다. 결재를 맡으러 가면 교감도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며 결재해 주었다. 당시에는 우리가 얼마나 엉망인 시스템에서 살아가고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원시사회의 일처럼 멀리 느껴진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직선제 개헌 요구로 6월에는 온 시민이 퇴근 후 저녁이면 서면으로 나갔다. 서면은 전쟁터였다. 최루탄이 안개처럼 자욱이 깔린 12차선 도로였다. 범내골과 양정에서 양쪽으로 서면을 향해 시위대가 접근하였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가 있어 “아지매! 잘못하면 큰일 나요. 애는 왜 데리고 나와요!” 하니 “아이도 이런 역사적 사건을 눈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대답이 온다. 그랬다. 온 시민들이 독기를 품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시위대에게는 상쾌한 날이었다. 최루 연기가 빗속에 묻혀 효과를 낼 수 없었다. 6월 10일부터 매일 서면에서는 퇴근 시간 후 모여든 시민들의 시위가 일상처럼 계속되었다. 직장에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퇴근해서는 다시 시위 현장에 출근하는 놀라운 시민의식이었다.




직선제 개헌과 군사정권 반대를 외치는 날들이 보름 가까이 계속되었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사건으로 전국이 최루탄 가스로 괴로워하던 시기에 6월 9일 이한열 군이 최루탄 직격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자, 전국이 화염병과 최루탄 속에 휩싸였다. 모든 시민이 전국에서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결국은 정부도 항복하였다. 6.29 선언을 통해, 체육관에서 뽑는 간선제 대통령을 국민의 직선으로 선출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발표 후 이어진 이한열 군의 사망 소식은 핵폭탄급 뇌관이었다. 군사정권은 이한열 열사의 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연명시켜 폭발하려는 시민의 분노 표출을 미루어 파국을 미루어 온 것이다.




전국은 어두운 그림자가 낮게 드리워진 암울한 분위기였다. 6·29 이후 이한열 군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서울에 운구 인파만 백만 명 이상이 운집해 6.29 선언이 없었다면 민중의 분노가 얼마나 더했을지 정권은 큰 위협으로 느꼈을 만했다. 헌법이 개정되고 이어 선거가 시행되었다. 김대중, 김영삼 대표의 불화와 단독 출마로 양보도 타협도 없는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전두환, 노태우가 김영삼·김대중을 연금에서 해제하고 두 사람을 경쟁시켜 표가 분산되게 한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일에 동대신동 시장을 걸어가는데 초등학교 아이가 “엄마 김영삼 찍었나?” 하니 엄마는 주변 눈치를 보며 “그렇다”고 한다.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이니 끝판이 나겠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김대중 단일화 결렬의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당선된다. 선거가 있기 전 87년 11월 19일 선거에 치명적인 KAL 858기 폭파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이었다. 함께 봉고를 타고 가던 직원들에게 ‘혹시 이것이 조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니 모두 ‘그렇게까지야….’ 하는 표정을 짓는다. KAL기 폭파 사건은 김현희의 단독 브리핑만 기사화되었지 실제는 의문 속에 남아있다. 지금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노태우 군사정권은 소수당인 집권당을 억지로 다수당으로 만들기 위해 3당 합당을 한다. 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준 국민의 열망을 배반하는 반역사를 만들어낸다.




암담한 시간이 흘러갔다. 4·19 혁명은 5·16쿠데타로, 10·26 사태는 12.12 반란으로, 1987 민주 대항쟁은 노태우의 당선으로 우리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해 나는 나의 작은 신념을 포기한 대가로 2년을 더 근무하다가 89년 8월 전교조 사태로 결국 해고되어 학교에서 튕겨 나왔다. 6년을 노력해 임용된 학교를 겨우 4년 채 되지 않는 근무 기간을 견디지 못했다. 힘들게 들어가서 너무나 쉽게 줄을 놓아버렸다. 임용의 어려움에 비해 해고는 너무 단순하고 쉬웠다. 지금 돌아보면 만삭인 아내를 두고 간 큰 짓을 했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하지만 늘 퇴행과 반성의 연속이었다. 잘못된 역사를 시민이 바로 잡아 놓으면 정치인들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과거로 퇴행해 버리는 반동의 역사였다. 지금의 내란 정국도 내란을 옹호하는 집권당의 딴지에 또 본질은 미루고 곁가지로 논쟁만 하다가 정권마저 탄핵 반대 집단에 갖다 바치는 결과가 오지는 않을지 몹시 불안한 속에 정국을 본다.



https://youtu.be/RqGcV4NZ57I

P.S 커팅 크루의 (I Just) Died In Your Arms 가사를 보고 글의 여운을 더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70대 아버지와 40대, 30대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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