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큰 일인 줄 알았지만 별일 아니었던 순간
엄마가 말했다. 인생에서 황금기는 취직하고 결혼하기 전 아가씨일 때라고. 몇 번의 고배를 마시고 원하는 직장에 안착하였다. 취직하고 나니 연애하고 싶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20대 중후반의 청춘남녀들은 곁눈질로 흘깃거리며 주변의 비슷한 또래를 탐색하기에 바빴다. 임용고사를 준비할 때, 내 코가 석 자였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을 서로 소개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만남 끝에 무더운 여름날. 내가 소개해 주었던 둘은 연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둘은 결혼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크고 작은 오해들로 둘의 틈은 벌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한쪽이 다른 쪽에게 이별을 고했다. 인연을 맺는 것은 함께 시작하지만, 맺은 인연을 끊는 것은 당사자 간에도 시간 차가 존재한다. 한쪽은 마음을 정리했지만, 다른 한쪽은 그러질 못했다. 정리하지 못한 쪽이 원망과 서러운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로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는 가운데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듣고 있던 나는 몹시 곤란했다. 둘 다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한 사람만 알았다면 확실히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신나게 뒷담화를 해줄 수 있는데, 맞장구를 치자니 남은 한쪽이 마음에 걸렸다. 중립 기어를 유지하기로 했다.
"네 이야기를 들으니. 네가 그런 나쁜 의도로 상대를 대하진 않았겠지만, 행동만 보자면 그런 오해를 받을 만했다." 휴대 전화 너머로 짧은 탄식이 이어졌다. 대화는 그것으로 종료되었다. 며칠 뒤 친구에게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는 연락이 왔다.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연애하는 동안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하는 에피소드를 듣고 있었다. 다른 한쪽을 등지고 뒷담화에 가담하는 느낌이 몰려들었다. 그 자리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다. 주문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녹아 컵 주변에 물기가 송골송골 맺혔다. 5월이었지만 더위가 일찍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허벅지 뒤쪽에 땀이 차서 속치마가 달라붙어 있었다. 치마를 떼어내면서 웃으니, 친구도 따라 웃었다. 웃음소리가 슬펐다. 막연한 생각이 설핏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이 너와 나의 마지막이 되겠구나. 힘들게 임용을 치르고 맞이하는 첫 스승의 날인데. 그런 소중한 날을 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나보다 먼저 취직했던 그 친구가 만나자고 이야기하면서 덧붙였던 말이었다. 좋게 풀자고 만들었던 자리는 그렇게 끝이 나 버렸다.
스승의 날은 매년 반복해서 찾아왔고 나는 초임 교사의 풋내를 타성으로 덮어가고 있었다. 학급에 또래와 비교하면 사회성 발달이 늦은 아이 A가 있었다. A는 자극에 민감했고 대화도 자기가 아는 지식을 나열하는 수준이라 일방적이었다. 수업 시간에 관심사가 나오면 아는 지식을 읊어댔고, 수업의 흐름은 끊어지기 일쑤였다. 학급의 아이들은 A를 잘 견뎌주었으나 기말고사를 앞두고 A에 대한 피로도는 이미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피로감은 배척과 놀림, 빈정거림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주는 자극 앞에서 A는 고성과 울부짖음으로 대응했다. 수업 시간에 A의 목소리가 교실 문을 넘어 복도로 울려 퍼지는 횟수가 잦아졌다. 빈정거림과 울부짖음이 일정한 기류를 형성하여 교실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분위기를 한 번 끊어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을 벽면으로 옮기고 교실 중앙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원을 만들어 다 같이 바닥에 앉아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쭈뼛거리며 아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A와 아이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자기의 힘든 부분을 털어 놓았다. 자기중심적이고 관계에서 일방적인 A에 대한 피로감이 주된 내용이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울고 화를 내는 모습이 힘들다고 했다. A에게 물었다. 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냐고. 그 행동엔 어떤 의도가 담겨있냐고. 행동 너머로 말하고 싶었던 마음이 무엇이었냐고. “제가 우기는 것도 있지만 친구들이 놀리듯이 말하고 무시하는 걸 보면 화가 났어요. 억울했어요. 그래서 소리 지르고 울었어요. 누가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A의 울부짖음과 고함이 그런 마음을 잘 전달하고 있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화난다는 건 전달이 됐어요. 하지만 너무 공격적으로 행동하니 보고 있으면 같이 화가 났어요. 그게 도와달라는 말인지는 몰랐어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진중한 편으로 평소에 말수가 적어 학급 내에서 존재감이 미미한 학생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의견을 물었다. 생각을 가다듬는지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A가 차분하게 말해도 애들은 A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아요. 애들이 A의 말을 좀 들어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실이 갑자기 숙연해졌다.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여학생이 의견을 보탰다. 상황을 주도하기보다는 늘 관망하는 태도에서 한 발 빗겨서 있던 아이였다. ”A가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면 ’넌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기는 부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A가 하는 말이 맞는지, B가 하는 말이 맞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친해지고 싶은데 늘 거절당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아요. 서로 배려가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발언의 횟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그리고 묵직하게 자기 의견을 보태준 목소리가 있었기에 대화는 잘 마무리되었다. A도, A와 자주 마찰이 있었던 아이들도 서로 노력해 보기로 했다. 이야기했다고 하루 만에 달라지기야 하겠냐만 일단은 해보는 걸로. 지내다가 또 예전으로 돌아갔다 싶으면 오늘처럼 다시 모여 이야기를 해 보자고. 16살 아이들의 한 시기가 넘어간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틀린 것들이 있다. 그때는 세상의 전부였지만 지나고 보면 왜 그렇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느냐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보면 맞고 틀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때가 온다. 그때는 맞았던 것들이 지금은 틀린 경우가 많으니까. 시시비비가 중요했던 16살도 시간이 지나면 접어주는 것이, 넘겨주는 것이 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 이런저런 경험 속에서 아이들도 품이 커질 것이다. 넓어진 품속에서 맞고 틀리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관계에 시선을 두는 여유가 생기는 날도 올 것이다.
20대 무렵의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둘 다 아는 사이에서 한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곧 뒷담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마흔이 된 나는 이제서야 안다. 그냥 들어주면 되는 거라고. 굳이 무언가를 해결하려 할 필요도 없었고 판단을 내려주려고 할 필요도 없다. ‘힘들었겠다’ 그 한마디를 건넨다고 내가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왜 나는 그토록 모질게 친구를 심판대에 올리려 했는지. 소원해진 관계 속에서 친구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 시절 나의 아집과 미성숙한 행동을 사과한 내용이었다. 초조하게 답신을 기다렸다. 몇분쯤 흘렀을까. 친구에게서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요약하자면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문장 중에 한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네가 그만큼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었던 거지. 그런 사람이라서 나도 더 예민하게 나를 이해해달라고 어리게 굴었던 것 같아.” 사과를 주고받았다고 몇 년간 끊겼던 관계가 예전처럼 회복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이미 흘러간 사이다. 다만,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헤어지겠지. 먼저 건넨 나의 사과가, 뒤늦게 받아준 너의 용서가 그 정도의 의미인 것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만족한다. 그때는 찬란했지만 지나고 보면 추억으로 남겨야 하는 사이도 존재하는 것이니까.
70대 아버지와 40대, 30대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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