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큰 일인 줄 알았지만 별일 아니었던 순간
퇴직 후 자유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 나태한 생활에 젖어 버릴 것 같았다. 다음 디딜 돌을 찾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너무 조급해한다고 말했지만, 편한 생활을 경계했다. 함께 근무했던 남선생의 친구가 양산에서 중소기업인 G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장과는 몇 번의 술자리를 함께 가지면서 오래전부터 친해져 있었다. 그는 퇴직 후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퇴직하는 달인 2월이 다 지나갈 무렵인데도 일자리가 정해지지 않고 시간만 흘러갔다. 결단이 필요했다. G산업의 B사장을 찾아가서 일자리 부탁을 하니 자기 공장에서 일하며 나은 일자리를 알아보자고 했다.
G산업은 고무벨트 회사의 하청 기업으로 자동차 유리와 바디 사이의 물막음용 고무 패킹을 생산했다. 그랜저, 제네시스 등 고급 차종에서 일반 차종까지 창문에 사용되는 패킹을 여러 형태로 만들었다. 고무를 넣어 주물에 형태를 뜨고 이음새를 잇고 필요한 경우 단추도 달고, 여러 공정의 성격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는 꽉 짜인 일련의 작업이었다. 불필요한 동선을 줄이고 공정을 최적화하기 위해, 필요한 곳곳에 작업 도구가 비치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이런 도구가 최적의 장소에 비치되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6시경 동래 충렬사 앞에서부터 B사장의 그랜저가 통근용으로 운행되었다. 부산에서 출퇴근하는 직원들과 함께 양산 공장까지 출근하였다. 근무하는 동안 B사장이 가끔 함께 점심을 하며 근무하는 데 힘든 점이 있는지 물었다.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일하는 사장의 모습이 겸손해 보여 좋았다. 늘 직원들을 차별하고 갑질을 예사로 하는 관리자가 대다수인데 말이다. 약 80명의 직원 중 여성과 남성이 반반의 비율인데, 나는 잡부 겸 검사부 일을 했다. 손수레에 고무 원단을 싣고 공정마다 일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옮기는 일과 작업이 완료된 고무를 파티션별로 나누어 저장소에 모으는 일을 했다.
말로만 직업의 귀천 의식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노동을 하고 싶었다. 젊을 때 막노동을 해본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는데, 마음일 뿐 실제는 달랐다. 고무를 다발로 묶어 놓으니 그 무게가 상당했다. 생각과 몸은 따로 놀았다. 고무를 접착제로 이어 붙이고, 붙인 것을 확인하고 단추를 다는 작업 과정에는 여성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늙은 할배 풋내기가 여성들 작업장으로 들어오니 모두의 관심 대상이다. “무엇하다가 왔어요?” 하고 여기저기서 묻는 말에 “과거는 묻지 마세요. 그냥 살라꼬 합니다.” 라 답하면 모두 웃음으로 그 순간을 넘긴다. 고무 묶음을 옮기는 작업을 빌빌거리며 하고 있으면 나이 많은 여성 노동자가 와서 종이 드는 듯 가뿐히 옮겨 주고 간다. 고무 다발을 반동으로 어깨에 쉽게 들어 올린다. 그야말로 경험자가 선생이다. 여성 노동자는 동갑이라며 반갑다고 “예전에 무슨 일을 하다가 왔냐?”라며 이것저것 관심거리를 물어본다. 궁금해하는 물음에 답하며 고마움을 눈으로 표했다.
현장에는 새로운 노동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노동 분쟁을 차단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노동자들은 일용직으로 고용된 노동자의 신분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대표가 되어 회사 대표와 계약을 맺는 형태라 홀로 사업자이고 사장이다. 노동자의 명칭을 사장으로 부르는 현실이 사기 치는 사회같이 느껴졌다. 개인이 사용하는 모든 커피, 끈, 작업에 필요한 일부 용품마저도 개별 사업자인 노동자들 스스로 준비했다. 자신이 가져온 커피를 나에게 권하며 마시라고 하니 고마웠다. 나도 답례로 큰 봉투의 사탕이며 커피를 사서 나누고 함께 마셨다. 친구가 나의 이런 행위를 듣고 “임마, 니가 공장장이가!” 하는 힐책을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집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삶의 현장으로 나와서 섬섬옥수 고운 손으로 거친 고무 작업을 하는 여성들이 안쓰럽고 고마웠다.
검사부는 나 같은 임시직이 땜빵 삼아 작업하거나 처음 오면 작업 지시를 받고 생짜배기로 일을 해 나가는 첫 부서이다. 늘 새로운 사람으로 작업반이 구성되기 때문에 똑같은 작업 내용을 반복 설명하며 일했다. 비효율적이다. 작업 편람을 만들면 반복 설명하는 낭비를 줄일 테고, 노동자도 쉽게 적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작업 매뉴얼을 만들려고 B사장에게 “작업 과정의 일부를 촬영해도 되겠냐?”라고 하니 펄쩍 뛴다. 노동 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는 자료라 경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하기야 내가 이 회사에 임시직으로 취업하기 전 사장이 나에게 다짐을 받은 것이 있다. 모든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입사가 허락된 것이다.
20일 정도 지나 어느 날 사장이 불렀다. 다른 공장에 고임금 자리가 났는데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돈에 욕심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고령의 재활용품인 인간에게 고임금을 주겠다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맡게 될 일은 고무에 펀치로 구멍을 내는 작업이라며 새로운 사장의 이름과 함께 알려 주었다. 우리 회사의 소규모 작업장에서도 하는 공정이다. 고무에 얼마나 정밀하게 구멍을 내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너무 깊이 구멍을 내어 버리면 안 되고, 이중의 고무면 중 한 면만을 관통해야 하는 작업이다. 혼자서 옮기고 저장하고 차에 싣고, 펀치로 뚫는 일인데 잠시의 쉴 새도 없다. 이 작업을 중년의 여성 노동자가 혼자 도맡아 일하고 있었다.
J사장이 처음 면담을 할 때 나에게 물었다. “돈이 절박하냐?” “그렇지는 않다.”라고 대답했다. 돈에 미쳐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하려는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대답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했다. 다음 날 시내에서 남선생, B사장과 셋이서 술을 한잔하며 이야기가 이루어졌다. B사장이 내가 꽤 임금이 높은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고 말하자 남선생이 '나도 그런 자리 하나 구해 달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내가 농담 삼아 “일에 경험이 있는 경력사원이라야 한다.”라고 하니 B사장이 크게 웃으며 맞는 말이라며 추임새를 넣어준다.
15일 후 새 직장으로 출근하기로 하고 B사장의 공장에서 일을 이어갔다. “우리 공장에서 잠시 실습을 해보고 가면 수월할 텐데….”라고 B사장이 말한다.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하고 내심 기대를 했다. 하지만 사전 경험의 기회는 제공되지 않고, 그냥 잡부로서 시간이 흘러갔다. 새 공장으로 출근할 시간이 다가오자 부정적인 생각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펀치로 많은 제품을 불량으로 만들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작업실에서 늦게까지 혼자 남아 전전긍긍할 자신을 떠 올리니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임금은 적더라도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일을 택하여 그림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5년 정도 그림 공부를 해 왔는데 인제 그만둬버리면 여태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된다.
출근 며칠 전부터 마음속에 발목을 잡는 여러 가지 핑계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 않으려면 핑계가 생각나고 어쨌든 하려고 하면 방법이 생각난다는 말처럼…. 출근 전날 B사장에게 전화하여 “일을 하지 못하겠다.”라고 하니 그도 황당해한다. “내일 당장 출근인데 지금에서 이러면 어떻게 하느냐?" 비난의 말이 들리자, 수치심으로 온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B사장은 “그렇다고 만나지 않을 사람도 아니고!”라며 위안이 되는 말을 남기면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B사장이 새로 일하게 될 곳의 사장과 잘 아는 사이이니 미리 이야기가 전달되리라 생각하고 다음 날 출근하지 않았다.
저녁에 B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출근하지 않았냐?”라고 물어서 “어제 말씀드린 대로 사장님이 새 일터의 사장에게 말을 전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출근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내가 왜 그런 일을 하느냐!”라며 불같이 책망의 말을 하였다. '내일 내가 직접 일하기로 했던 곳의 사장에게 가서 이야기하겠다.'라고 연신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모멸감으로 온몸이 와들거렸다.
출근하기로 약속되었던 회사의 사장을 찾아갔다. 그는 슬쩍 곁눈질로 쳐다보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며 “어떻게 된 일이냐?”라고 묻는다.
“생각해 보니 힘에 부쳐 자신감이 없어서 일을 못 하겠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라는 그의 말이 비아냥과 모멸의 의미로 느껴졌다.
“이제 당신 같이 나이 많은 사람은 고용해서는 안 되겠군요. 돈이 절박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신문에 광고를 내어도 급히 구할 수 없고 참 난감하네요!”라고 말한다. 어쨌든 내가 잘못한 것이다. “잘못했습니다. B사장님에게 너무 심하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고맙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계속 미안함을 표시하고 나왔다.
모멸감, 수치심, 자괴감으로 순간순간이 처참하고 괴로웠다. 어째 살아가며 이런 낭패스러운 순간을 만들다니…. 이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경비를 하겠다고 이력서를 내놓았던 건물 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난번에 낸 이력서대로 일할 생각이 있으면 건물로 오라”고 했다. 임금은 적지만 그림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근무 환경이었다. 작은 아이의 학자금 융자 받은 금액 2,500만 원을 상환하기 위해서는 3년은 근무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출근했다. 근무시간에도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라 저임금도 감수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3년을 보내고 모든 수입과 관련된 일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내 생애 최악의 자괴감으로 괴롭던 순간도 시간이 흐르니 그 충격이 줄어든다. 땅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모멸감도 시간이 흐르니 잊힌다. 충격을 받은 그 참담한 순간에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충격을 되새기고 싶지가 않다. 미리 이야기했다면 그렇게까지 모멸스럽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을 안일하게 한 결과이다. 살아가며 그런 순간은 없어야 한다.
살아있는 우리에게 견디지 못할 만큼의 일들이 있을까? 견뎌내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모든 일이 그렇다. 견디지 못할 만큼의 일은 없다. 죽을 것 같이 괴로운 순간도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보면 훨씬 가벼워져 있다. 고통스러운 순간도 지금 숨을 쉬고 있으면 극복된 것이다.
70대 아버지와 40대, 30대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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