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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Aug 21. 2024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기를

#23. 좋아하는 유명인 - 이동진

보고 싶던 영화가 있었다. 그날을 돌이켜 볼 때, 사실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내 돈과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영화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목을 검색하였을 뿐이다. 시작은 영화 제목이었지만 정보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터넷의 세계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이동진’이라는 영화 평론가였다.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블로그의 게시물이었다. '영화 평론계의 아이돌'이라는 평을 받는 이동진은 이미 팬층이 두터웠으며 그의 팬 중 한 사람이 이동진의 영화평을 모아 블로그에 정리해 두었다. 잡지에서 보던 서평과 달리 그는 ‘한줄평‘이라 하여 길어봤자 세 네 문장 정도의 길이로 감상평을 압축적으로 제시하였다. 많은 한줄평 중에서도 특히 시선이 머문 것은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한줄평이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장애인인 여성과 비장애인인 남성의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서로에게 몰두하고 마음 한 켠을 내어주던 연인은 이내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대학 졸업을 앞두며 번번이 구직 면접에서 낙방을 하는 그에게 장애인인 여자친구와의 미래는 너무 까마득하다.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감을 견디지 못하고 남자는 여자를 떠난다. 시간이 흐르고 남자에게는 새 여자친구가 생긴다. 그녀가 자기에게 집밥을 해주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 말을 듣는데 그는 갑자기 남겨 두고 도망쳐 나왔던 옛 연인이 생각나 오열을 한다. 영화의 장면은 전환되고 뒤이어 남자를 오열하게 만들었던 그녀가 나온다. 남자 친구 없이는 집 밖의 세상에 나올 수 없었던 그녀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길가를 오고 간다. 더벅머리에 가까웠던 그 시절의 미숙함은 사라지고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로 씩씩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버리고 떠나온 자는 여전히 그 시간에 남아 오열하지만, 버려졌던 자는 그 시절을 뒤로하고 자기의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결말 자체가 주는 여운으로 인해 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문득 생각이 나던 영화였다. 이동진은 이 영화에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부디 우리가 도망쳐온 모든 것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기를. 결국 우리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지 않기를.'


영화만큼이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불쌍한 여자친구를 버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해가며 영화를 봤던 20대의 나였다.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에서 묘한 승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내가 30대가 되어 이동진의 한줄평과 마주하였다. 나에게도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언가에게서 도망쳐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으레 그런 경험이 있다. 초라함, 부박함의 뒷모습도 너무 누추하지 않기를 바라며 남자 주인공을 끌어안아 주는 문장을 남긴 그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동영상 검색 사이트에서 '이동진'이라는 이름 석자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그는 신문사에 취직하여 영화코너의 기사를 쓰며 인기를 얻게 되었다. 10년간의 회사생활은 자기가 조직사회와 그다지 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간절해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현실이 자기를 압도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망가져도 좋으니 여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10년간의 기자 생활을 접고 현재까지 25여 년 간의 영화 평론가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운이 좋다고 하였다. 포장 없이 자신의 충동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이동진이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 책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깊게 탐구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탐구한 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호모사피엔스', '총균쇠' 등과 같이 쉬이 읽어지지 않는 많은 분량의 책을 정리하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여 동영상으로 공유했다. 동영상 촬영을 앞두고 어떤 내용을 말할지 머릿속에 몇 개의 꼭지를 생각해두기는 하지만 할 말을 전부 대본으로 쓰지는 않는다고 했다. 몇 가지의 핵심어를 기준으로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해설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그에게 나는 점점 빠져들었고 몇 가지 인터뷰 영상을 더 찾아보기도 했다. 수집벽이 있어 일 년에 책과 음반을 각각 1,000권 그리고 1,000장 정도를 사모은다고 하였다. 이미 집에 보유하고 있는 책이 20,000권을 돌파했으며 음반도 10,000장이 넘는다고 하였다.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고 좋아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아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에 마음이 치우쳐 퇴사를 한 그였다. 그는 자신이 평했던 영화의 평점이나 한줄평에 대해 시간이 지난 후 생각이 바뀌면 그것을 수정해 둔다. 수정한 것들을 따로 정리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둔다. 영화 평론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평을 받는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번복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 시절의 아둔함도 미숙함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드러내고 고쳐나간다. 아마도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가 보다. 시간이 지나 나의 부박함을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언젠간.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기를. 결국 우리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지 않기를. 누추한 삶의 뒷모습도 언젠가는 추슬러 갈 수 있는 우리이기를.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땡비] #23. 내가 좋아하는 유명인

 - 못골 글 보러가기 : 바람의 말 마종기 https://brunch.co.kr/@ddbee/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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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난의 글 보러가기 :  가을이 왔다. 성시경이다. https://brunch.co.kr/@ddbee/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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