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받아 본 congratulation 메일
남편의 지방 발령으로 속초로 이사를 가게 되어 외국계 회사에서 퇴사를 한 후,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느긋하게 독서를 하고, 응답하라 1988을 한창 보던 어느 화요일,
홀린 듯이 검색창에 카타르항공 오픈데이를 검색했다. 그 주 금요일에 마닐라에서 오픈데이가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기억난다.
두근두근 했다.
면접 준비를 안 한 지 1-2년이 넘었고, 이젠 미련 없는 줄 알았는데도 내 마음은 너무나 크게 외치고 있었다. 지원하자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해보자고.
남편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내내 장거리 연애만 했던 사이라 신혼생활은 깨를 볶으며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요리에는 취미도 재능도 없었지만
남편의 저녁을 차리는 것도 소꿉장난 하듯 재미있었고, 퇴근하고 온 남편은 부엌에서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며 무언지 모를 괴식을 내놓는 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는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 앞으로 평생, 전형적인 아내이자 엄마로만 살게 될까? 그렇게 살면 나는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이 움츠려있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대뜸 카타르항공 오픈데이를 검색한 건, 그 생각이 행동으로 뿜어져 나온 결과였던 것 같다.
마닐라행 비행기 티켓을 알아봤다. 오늘이 화요일. 목요일 밤에 출발해서 금요일 새벽 2시에 도착하는 세부퍼시픽 항공편이 있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같이 가자고 했다.
행여나 떨어지더라도, 나는 면접 보러 온 게 아니라 엄마랑 해외여행을 하러 온 거라는 정신승리를 할 참이었다.
대뜸 무슨 마닐라냐는 엄마에게 도착하면 현지 패키지 투어에 보내드리고 나는 면접을 보러 가겠다고 했더니 아직도 그 병 못 고쳤냐는 듯,
잔소리를 하시면서도 기꺼이 동행해 주시기로 했다.
바로 cv(cover letter)와 resume를 작성했다. 예전에 쓰던 지원서를 그대로 쓸 순 없었다. 비행과 통역 경력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썼던 카페나 호텔 알바와는 비교도 안 될 말 큼 업그레이드된 경력이었다.
결혼을 했다는 점과 이미 비행을 해봤다는 사실이 떨어져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커버레터 내자마자 떨어지면, 엄마랑 마닐라관광을 하면
그만이라고 합리화했다. 그러고 나니 긴장도 덜되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준비한 것도 없이 그렇게 서류만 챙겨 들고 마닐라에 도착했다. 새벽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나니 4시였다.
자기엔 글렀고 바로 샤워를 하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머리라 잘 되지도 않았지만 괜찮았다.
떨어지면 말지 뭐. 이제 진짜 후회 없어 난 할 만큼 한 거야.라고 되뇌며 6시, 오픈데이가 열리는 마닐라호텔로 향했다.
이미 엄청 많은 면접자들이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대기 중이었다. 나이도 다들 나보다 10살은 어려 보였다. 외항사 면접은 국내항공사와는 달리 흰 블라우스에 블랙 스커트보다
자신의 매력을 가장 잘 어필할 수 있는 의상을 선택해서 입는 편이다. 메이크업도 굉장히 진하고 컬러풀하게 하곤 한다. 핑크, 아쿠아블루, 버건디(카타르항공 유니폼 컬러다)
등등 아주 다양했다. 나는 푸른 원피스에 흰 재킷을 입었지만 메이크업은 과하지 않게 했다. 내 마음에 드는 메이크업을 해야 자신감 있게 면접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봤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수수하고 단아한 핑크립스틱에 복숭아색 치크가 다였다. 메이크업을 잘하지 않던 나는 아이라인도 뷰러도 손댈수록 역효과만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영어가 따갈로어와 함께 모국어인 만큼 다들 나보다 영어가 유창할 터였지만 그때까지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가 면접관에게 커버레터를 제출하고 스몰톡을 나눈 후, 다음날 그룹 디스커션과 필기시험 인비테이션을 받고 나자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정말 카타르항공에 입사할 수 있을까?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기 때문이다. 면접 준비를 한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룹 토론이나 1:1 면접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2년 전, 필사적으로 면접 준비를 했던 나를 떠올려보자면, 지금은 무기하나 없이 벌거벗고 전쟁터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2년 전의 나처럼 면접 준비를 해 온
면접자가 있다면 당연히 그 사람이 합격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마닐라로 와서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면접 준비를 했다.
다음날, 도하(카타르항공의 베이스 도시)-런던 구간의 서비스 시퀀스를 짜보라는 주제의 그룹 디스커션을 마치고 나서, 최악의 컨디션으로 맞이한 대자연은
나를 너무나 당혹스럽게 했다. 오후 두 시쯤이었는데, 한 끼도 먹지 못한 채로, 대자연까지 찾아오니 정신이 혼미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메이크업이 지워질까 봐, 그리고
언제 합격불합격 통보를 할지, 언제 다음 면접이 시작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뭘 먹으러 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다른 면접자들은 필리핀 현지인들이었기 때문에 집에서 먹거리들을 준비해 오기도 하고 가족인지 친구가 간식을 사다 주기도 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건 차치하고
지금 무언갈 먹었다가는 모두 다 게워낼 것만 같았다. 쓰러지지만 말자는 마음으로 호텔 로비에서 파는 마카롱을 사 먹었다. 무슨 맛인지 기억도 나지 않고 한 박스에 6개 들어있는 마카롱을 세 개도 차마 먹지 못했다.
그리고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바로 에세이를 쓰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대한민국 입시의 필수코스인 논술 과외를 3년간 받아왔던 실력으로 길고 긴 에세이를 쓴 후, 다음날 파이널 인터뷰에 오라는 인비테이션을 받고
엄마가 계신 시티 패키지 투어에 조인하겠다고 연락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동행해 준 엄마에게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았다.
택시 안에서 부푼 가슴을 부여잡느라 몇 번이나 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라디오에서는 따갈로어가 나오고 있었고
나는 혼미한 와중에 다음날 있을 파이널 면접에 대해 생각했다. 합격이 코앞에 있는 듯했지만 마음을 부여잡았다. 여기까지는
이전에도 수없이 왔었다. 기대는 금물이었다.
파이널 면접날,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면 그건 면접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카타르항공 최종면접때도 만났던 면접관이었는데
당시 눈에 띄게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혼자만의 생각 아니냐기에는, 너무나 명백했다. 그래서 그때는 정말 합격인 줄로만 알았다.
함께 있던 폴리쉬 면접관이 나를 떨어뜨렸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때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면접관이 오늘도 내 앞에 앉아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풀로 장전이 된 상태로 나타난 내게 질문은 고작 두 개뿐이었다.
“비행경험이 있네? “ 와 ”너 결혼했네? 남편이 떨어져사는 거 괜찮대? “ 이렇게 끝.
심지어 첫 번째 질문은 답변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당연히 받을 걸로 예상했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했던 두 번째 질문에는 막힘없이 술술, 하지만 자연스럽게 대답을 했다. 수없이 떨어졌던
지난 면접을 복기하면서 다짐했던 건, 내가 너무 준비된 답변을 로봇처럼 읊어댄 게 부자연스러웠을 수 있으니 질문을 받으면
한 템포 쉬고, 편안하게 막 지어낸 듯 대답하자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파이널 면접을 40분이나 봤다고 했는데 나는 4분도 안 걸려서 끝이 났다. 긴장이 풀리면서 허탈했다.
마닐라까지 온 게 그냥 정말 마지막 남은 미련을 청산하기 위한 것이었나......
이제 다 끝났으니 한숨 돌리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러 가면서 좀 쉬어야지. 하는 순간 생리통이 이제 내 차례라는 듯 괴롭히기 시작했다.
3일째 잠도 거의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 한포진이 입술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하루를 꼬박 자면서 앓았다.
후회는 없었다. 나는 정말로 불태웠고,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다. 그걸로 되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면접 이후로 아무런 통보도 연락도 오지 않는 6개월 동안 희망은 점차 희미해졌다.
내가 극한의 면접을 보긴 했었나 의심스러운 날도 있었다. 꿈을 꾼 건가 싶기도 했다.
어느 초여름 성경일력을 넘기던 아침, 매일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면서도 그날 일력에 쓰인 말씀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걸 보고도
별생각 없었던 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6개월은 긴 시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강아지를 안고 소파에 누워 메일함을 열었는데, 발신인이 Qatar Airways 인 메일이 와있었다.
입을 틀어막고 떨리는 손으로 클릭을 했다. 3초 남짓이었겠지만 내게는 마치 영겁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던 로딩이 끝나고 뜬 메일에서
귀가 먹먹해지고 가슴이 터질 듯이 뛰게 하는 문장을 보았다.
congratulation!
꿈에도 그리던, 하지만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