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마다 어반스케치 강좌를 듣기 위해 인근 대학교에 간다. 평소 배우고 싶던 강좌가 그 대학 평생교육원에 개설되어서다. 길에서 마주치거나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면 괜히 가슴이 설렌다.
5층 강의실로 향하는 길, 1층 엘리베이터 앞은 늘 기다리는 학생들로 붐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가고 싶지만 참는다. 인파 속을 비집고 의자부터 찾는 어른처럼 굴기 싫었다. 발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그렇지만 마음과 달리 마지막 계단을 넘을 때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도 가빠온다.
단톡방에 강사가 올린 이번 수업 자료를 보다가 눈길이 멈췄다. 여유로운 시골 풍경이나 고풍스러운 유럽 골목길을 스케치하며 색칠하던 이전 수업과 달리, 이번 그림들은 분위기가 달랐다. 모든 그림이 흑백 사진처럼 어두웠다.
그중 도시 풍경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하늘을 향해 솟은 마천루와 울창한 숲처럼 빼곡히 들어찬 크고 작은 건물들. 뉴욕으로 보이는 그 도시는 방금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어두웠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빛을 빨아들인 도시의 야경일지도 모른다. 휘황찬란하지 않고, 어둠 속에 잠긴 도시의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강사님, 이런 느낌은 어떻게 표현한 거예요?” 강사가 연필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이 수성 연필은 물과 만나면 완전히 다른 매력을 보여줍니다.”
나는 곧 수성연필을 들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손끝에서 점차 빌딩들의 명암이 살아났다. 가까운 곳은 짙고 묵직하게, 먼 곳은 가볍게 스치듯 스케치했다. 마침내 연필과 물이 만나자, 진회색 선들이 마법처럼 녹아 퍼져나갔다. 어둠 속으로 스며든 도시는 차가운 얼굴을 지우고, 묵직한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그런 도시에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늘 도시를 동경했다. 빌딩 사이를 누비는 자동차와 전철, 분주히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젊었던 시절, 평온하고 익숙한 시골보다 생동감 넘치는 도시가 더 끌렸다. 백화점, 대형극장, 도서관, 미술관, 심지어 공항이 가까운 환경은 내가 꿈꾸던 미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작은 도시에서 오랜 교직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이직이나 이사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퇴직 후, 마침내 도시에서의 삶을 계획했다. 첫 번째 1년 살이 정착지는 대전이었다. 남편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전혀 낯설지 않기도 했지만, 유성천과 갑천이 부드럽게 휘감은 모습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오피스텔에 머물며 밤늦게까지 근처 골목을 산책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천변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과 물오리를 보면 가슴이 탁 트이고, 한결 젊어진듯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시끄러운 도로와 빽빽한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화봉산과 매봉산이마치 그림 속 풍경처럼 근사하기까지 하다.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면 좋으련만 실력이 따라주지 않아 아쉽다.
평생교육원에서 만난 사람들, 밤늦도록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는 봉명동길, 이팝나무 아래 온천물로 족욕하며 나누던 이야기는 대전이 가진 따뜻한 매력이다.
수성 연필이 물과 만나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듯, 나 역시 물처럼 흘러가는 삶을 배우고 있다. 한 방울의 물이 그림을 완성하듯, 대전에서 보낸 매 순간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채워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