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모먼트'를 위하여
나는 지독한 회피형 인간이었다. 긴장 상태가 극으로 치닫는 순간 숨어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당당하게 과거형으로 쓰긴 했지만 사실 지금도 내 몸 어딘가에는 회피형 바이러스가 숨어있긴 하다. 하지만 많은 노력으로 그것들이 대놓고 있지않고 숨어있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하고 있다.
내가 회피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게 된 이유는 오롯이 나 때문이었다. 과거의 나는 어두운 방 안에 숨어 병을 키우고 또 키우느라 끊임없이 아팠었다. 숨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얼른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기만 했다. 덕분에 내 고통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나를 짓밟고 지나갔다.
"나 아프고 무서워"
며칠을 고민하다 아프다는 말을 처음 내뱉던 날. 엄마는 날 꼭 안아줬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 괜찮아졌다. 나는 말 한마디를 했고, 엄마는 나를 토닥여줬을 뿐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스스로 용기를 냈다는 사실에 약간 신이 났고 쑥스러웠다. 그리고 허무했다. 방 안에서 혼자 끙끙 앓던 그동안의 내가 가여웠다.
그 이후 나는 숨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음을 털어놓는 건 여전히 쉽지 않지만 부딪히면 생각보다 별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다시 어두운 방 안으로 되돌아가기 싫었다.
그동안 왜 회피를 하며 살았나 싶을 만큼 괜찮았던 순간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100%는 아니다.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상황을 잘 풀어내기 위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은 신뢰로 돌아왔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하던 달리기와 명상은 내게 여유까지 줬다. 할 수 있는 노력들은 얼추 다 해보려 했다. '그거라도' 하면 괜찮을까 나름의 몸부림을 쳐본 것이다.
20대 시절에는 빨리 30대가 되고 싶었다. 불안하던 나와 다르게 나의 선배들은 항상 다 괜찮아 보였던 게 그 이유다. 하지만 막상 내가 30대가 되어보니 알았다. 나의 선배들은 괜찮지 않았다. 그저 익숙할 뿐이었다. 경험이 쌓이니 피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을 하나 더 터득했을 뿐이었다.
모든 회피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적절한 회피는 살면서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피하며 살았기 때문에 적절하게 회피를 회피해야만 한다.
지난 주말, 영화 '소울메이트'를 보면서 서로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두 주인공들에게 과몰입을 했었다. 덕분에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마음이 아렸다.
안타까운 장면들이 연이어 나오는 동안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애들아 그게 아니야..' 좌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피하지 말고 대화하면 풀렸을 일인데, 서로를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마음을 이야기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두 사람의 상황을 아는 제3자의 입장으로 보니 마음이 아프고 시끄럽기만 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솔직하지 못했던 이유를 얼핏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회피가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이내 나를 생각하게 되니 입이 꾹 다물어졌다.
누군가 나의 상황을 제3자의 입장으로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렇다면 나의 선택들은 괜찮은 선택이었나? 애석하게도 후회만 남는 선택들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남은 기억들은 미화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후회는 후회로 남는다.
영화는 잘 풀리면 해피엔딩이 되지만 현실에서는 해피엔딩이 가능한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해피모먼트'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하든 후회를 할 테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어느 날 언니가 망설이던 내게 했던 말이다. 저 신기한 말은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선택하게 만드는 마법을 가졌다. 그래서 고민을 앞둔 상황에서 저 말을 떠올려 마법을 걸기도 한다. 100%의 성공률은 아니지만 꽤나 도움은 된다. 하지만 나는 회피를 안 할 자신이 없다. 내가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면 분명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미래의 내가 할 후회를 생각하고자 한다.
'그때 도망치지 말고 조금 더 용기 내 볼 걸..'
나는 나를 안다. 나를 알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결심할 뿐이다. 도망치지 말자. 적당한 회피만 하자. 괜찮으니까 이제 방에서 나오자. 나의 '해피모먼트'를 위해 회피를 회피해 보자, 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