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학원 자퇴 후 프라하 체코 인턴으로 (1)
말 그대로다.
난 어렸을 때 부터 자기계발, 철학 같은거에 관심이 많았고 사람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인생의 다양한 모습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미래를 누구도 확신할 수는 없다고 느낀 건 아마 대학생때 였을까.
중고등학교 열심히 학원 다니면서 공부하고 수능을 치뤘다. 사람들이 좋은 대학 가면 성공한다고 하던데 대학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때부터 아마 난 내 자신 스스로가 납득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았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걸 좋아했다. 앞의 이득만을 따지면 대학교 편입을 하는게 더 유리했겠지만 목표도 없던 시절에 굳이 그저 타이틀을 위해서 편입을 하는게 납득되지 않았다. 다들 대학교 1-2학년때 미리 따라는 토익조차 하지 않았다. 2년 후에 만료되는 시험이고 지금 토익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아서 따지 않았다.
우리는 왜 살까 라는 고민이 있을 때는 머리 아플정도로 그 골짜기안에 갇혀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소비가 주는 강력하고 순간적인 맛도 보았다. 사고 싶던 후드티를 구매했을 때 순간 기분이 참 좋아지길래 아 소비로 내 마음을 채운다는건 이런거구나 하고 알았다. 뭐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소비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옷은 입을 옷이 있는걸로 충분하고 지금은 돈을 모으고 굴리고 하는게 더 재밌다.
다시 대학교때로 돌아가자면, 교환학생이라는 목표를 위해 토플을 공부했다. 하고자 하는게 생기면 언제든지 튀어나갈 준비는 하고 있었으니까. 두달 정도 매일 아침 8시인가 신촌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복습을 하며 원하는 점수대도 얻었다. 결국 교환학생으로는 쓰이지 않았지만 학원 파트타임 선생님으로 일할 수 있었으니 도움은 되었던거나 마찬가지이다.
생각해보면 인스타는 없었다. 내가 인스타를 처음 시작한건 21살때쯤이었을 거다. 그땐 뭘 봤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에타에는 대학생 방학때 하면 좋을 것들 하고 리스트가 참 많았다. 대외활동, 봉사활동, 뭐 세계여행 다양한 알바등. 왜 그렇게 해야되는게 많았을까. 결국은 다 취업 잘하라고 하는거라면 뭘 그렇게 일찍 일을 하고 싶은걸까. 어처피 우리나라는 휴가도 많지 않아서 계속 주5일 일하는걸텐데. 전공 실력이 좋았던 그당시 남자친구는 대학교에 졸업장 하나 받으려고 왔다했다. 군대도 전문동아리 활동 끝나고 바로 갔다가 졸업하고 바로 취업할거라고. 자본주의 사회는 이런건가. 그때는 일을 열심히, 계속 성장하고 미국 회사나 그 쪽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기부여 받고 저게 맞지! 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미국이 많은 것을 선도하고 영향력도 세지만 정답은 아니다. 프랑스 친구는 과연 미국이 언제까지 그렇게 잘 나갈거라고 생각하냐고 묻더라.
유럽에 나와서 느끼는 건 우리나라는 참 미국을 많이 닮았고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열심히 일하고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곳, 더 많이 성장해야지. 끝이 없이 꿈을 크게 꾸자. 더 더.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나만 뒤쳐져 있다는 생각이 들텐데 잠시 멈춰서 생각해보자. 누가 만들어 놓은 레이스일까. 누가 주최한걸까. 미국의 자본주의 판 안에 우리는 희생양으로 들어간걸까. 성장욕구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요즘은 국제정치가 참 재밌다. 외국친구들과 얘기를 많이 하다보면 각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애기를 하게 되는데 한국인이 나밖에 없을때는 내가 바로 알지 못하면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더라를 말하는것도 통하지 않는다. 역사는 역사로만 봐야된다고도 생각한다. 역사를 집필하고 해석하는 것에는 권력의 힘이 들어가며 솔직히 말해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 전체라고 해야될지도 의문이다. 영토의 경계도 계속 바뀌었었고 그저 우리나라의 영토에 있었던 역사. 라고 얘기하는게 맞지 않을까. 중국도 뭐 대중국의 역사라고 파헤치면 고구려를 지들 역사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고 몽골이 자기들 선조아닐까.
내가 왜 역사 딜레마에 빠졌나면, 유럽에는 중화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 아니 많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중국이 아시아의 짱이었고 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 아시아의 클리세도 자기들의 입맛대로 만들고 중국풍과 비슷하게 한국도 생각하고. 그래서 한국의 숭례문, 전통 한옥등 문화재들을 보여주면 어 중국이랑 비슷하다, 중화사상으로 역시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중국 처럼 되고 싶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실제로, 한국어 과외를 했던 학생이 학교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발표한다면서 텍스트 첨삭을 부탁했는데 위의 뉘앙스라서 글 출처를 물어봤다. 보내온 책은 너무 충격적이었는데, 한국은 중국의 종속된 관계였고 중국 처럼 되고자 노력했다. 등의 말이 써있었다. ( 책 제목은 모른다고 했다. ) 너무 어이가 없어서 따로 조사를 해서 보내줬다. 중화사상은 중국 내에서 있던 일이고 한국이나 일본은 각자 자신의 문화를 계승해왔다고. 뭐 조공을 바치고 했던건 사실인데 그때의 왕조끼리의 관계를 지금의 '한국'과 '중국'의 명칭을 써서 말을 하는게 너무 불쾌했다.
또한, 한자를 korean-chinese 라고 얘기하는데 이것도 한국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그러는거 아니냐고 하길래 일본의 글자가 한자와 닮았다고 해서 한국과 일본이 중국을 롤모델로 삼고 성장한게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그때 당시의 문자는 한자였고 유럽의 알파벳의 탄생 배경 처럼 그렇게 서로 영향을 받은거라고.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 뿐인데 명칭이 korean-chinese 라서 우리를 중국어를 쓰던 나라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 한자는 다 같이 쓰던거다. 중국어를 다같이 쓴게 아니라. 명칭의 중요성을 다시 느낀다. 언어의 한계. 배추김치도 kimchi cabbage 라고 요즘에서야 미국에서 많이 표기하는데 예전에는 chinese cabbage 라고 쓰고 여기 프랑스는 말해뭐해 chou chinoise 라고 쓰여있다. 정말 피가 솟을 정도로 화가 많이 났었다. 친한친구가 그냥 인정해~ 그냥 명칭이고 영어로도 그렇게 써~ 라고 하길래 말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며 검색을 했다. 그리고 이 문제도 서경덕 교수가 노력해서 최근에야 정식명칭이 kimchi cabbage 가 되었음을 알았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몰릴 때 더더욱 내 선택을 신중히 한다. 개척하는 삶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데 되돌아보면 같은 배를 타고 가다가도 잘 내렸었다. 심리학이나 사회 실험 사례 책들을 읽었던게 머리에 남아있어서, 혹시 내가 그저 다수와 함께하기에 안전하다고 느끼는건 아닌지, 나는 이 배의 방향을 잘 알고 있는지 다리를 두들기며 건넜다. 대학생때 뭐라도 하는게 좋으니까, 한국장학재단에 멘토멘티 활동도 해보고 개발 연합 동아리? 도 참여해서 뭘 정확히 했는지는 모르지만 매번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강연도 들었다. 대외활동 뭐 정말 도움이 되는 활동도 있었겠지만, 그냥 모냥새만 아름답게, 이것 저것 말로 꾸며놓고 막상 보면 뭐 하는거 없고 그냥 나 이거 참여했어. 하는 빈 깡통들도 많이 봤다. 이유 모르게 답답했고 이런걸로 지금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는 브랜드 공부도 해야 되고 나를 분석적으로 브랜딩 해야 된다는 말이 와닿았는데 이제는 귀를 닫게 된다. 일단 내 자신과 순수하게 시간을 보내는걸로 충분하다. 미래를 생각하면서 약은 생각, 약은 선택을 하기 보다는 지금 주어진 자유를 그냥 나 원하는대로 사용하고 싶다. 그래서 파리 석사 알테넝스 취업도 그만두게 되었었다. 친구의 소개로 시작했던 파리 석사와 알테넝스. 덕분에 내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고 취업을 위한 상태로 다듬어질 수 있던 좋은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점점 내가 왜 파리에서 취업을 해야되지? 그게 나에게 지금 옳은 선택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지금 목마른 부분이랑 파리는 다르다는게 직감적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프랑스만을 고집하면서 나온것도 아니였어서 이참에 다른 나라로 가보는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인턴으로 일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어서 연락 하고 싶었던 스튜디오에 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합격했던 파리 대학원은 자퇴 메일을 보내고 등기우편을 보냄으로 끝이났다. 그리고 짧은 3개월 이지만 나는 프라하 체코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