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악몽
"........."
"췌장에 혹이 하나 보입니다."
"네? 췌장에요?"
사십 평생 살아오며 췌장에 혹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본 순간이었다.
양가 부모님을 비롯하여 나 역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건강과 먹거리에 관심이 많아,
췌장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까다로운 장기라는 것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손과 발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 또한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내 남편, 췌장암이면 어떡하지?'
항상 잔잔한 강물 같은 남편은, 호들갑스러운 나와는 달리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침착했다. 놀란 것도 잠시, 나 역시 이내 덤덤해졌다.
바로 나, 외유내강 아내 아니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지금 닥친 난관을 해결해야 했다.
이 상황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소견서와 CT촬영 자료를 챙겨 병원을 나오면서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른바 서울에서 제일 큰 종합병원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물론 진료 예약이 당장 불가능할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취소 자리가 있진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증상 설명과 함께 세부 진료과를 알아보고 날짜를 상담했다.
"췌장 보시는 교수님이 여러분 계신데, 먼저 췌장 내과에서 진료를 보고 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췌장 외과로 전원 되어 그때 수술 가능하십니다. 그런데 현재 내과 쪽은 3개월간 예약이 어렵습니다."
남편은 신혼 초부터 강도 높은 업무량으로 야근이 잦았고, 새롭게 맡은 업무까지 더해져 최근 몇 년간은 오로지 일에 몰두하며 지내왔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근무하면서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잃지 않으며 힘들지만 배우고 싶은 업무였다고 말하곤 했던 남편, 현재에 감사한다는 그런 남편을 아내로서 때로는 존경스럽게, 때로는 안쓰럽게 여겨왔다. 하지만 건강 앞에 장사 없다고, 남편의 스트레스가 쌓여갈수록 소화 불량이 지속되는 날들이 늘어갔고, 동시에 점점 살이 빠졌다.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남편의 안색은 차쯤 어두워져 갔다.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어 하루 연차를 내고, 시기를 당겨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복부 CT와 기본 피검사 이외에 추가로 여러 피검사를 신청했다.
얼마 전 읽었던 책 속의 소제목이 떠오른다.
'소중한 남편이 벌레가 되지 않도록'
- 빛날애 [내향인 엄마는 어떻게 대표가 되었을까] Chapter 2
이어지는 책 속의 인용 구절 역시 마음속 깊이 와닿았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을 꾸다 깨어났고,
끔찍한 해충이 되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 카프카 [변신] 제1장
우리 남편, 그레고르가 되어 가는 건 아닐까.
그 당시, 책 속 작가와 같은 말을 남편에게 했다.
"자기야, 너무 힘들면 직장 쉬어도 아니, 그만둬도 돼. 나와 아이들에겐 자기가 제일 소중하니까."
내일은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에 연차를 내고 검사를 받으러 와서 이게 웬 날벼락이람. 이틀 뒤엔, 큰 아이 유치원 졸업식까지. 별일 없을 거라 가볍게 생각하고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즐겁게 보내려던 계획은 와르르 무너졌다.
아이와 웃는 얼굴로 졸업식에 참여할 수 있을까.
도대체 우리 가정에 왜 이런 큰 시련을 주시는 걸까.
손가락의 묵주반지를 돌려가며, 두서없이 기도문을 읊어댔다.
퍽 하면 울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꾸만 덤덤, 담담, 단단해져 가는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