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학교도서관 사서가 되었습니다.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도서관 같은 곳일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나는 어려서부터 읽는 것을 좋아했다.
생각해 보면 활자중독 수준으로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중엔 집에 읽을만한 책이 없어서 요리책, 슈퍼마켓 전단지까지 꼼꼼히 읽었다.
변덕스럽고 끈기가 없어서 무엇에 깊이 빠져 본 일이 없는데 유일하게 독서는 지금까지도 나의 즐거운 취미생활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내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볼 용기는 한비야 작가가 주었고, 사랑하는 법은 알랭드 보통에게서 배웠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들은 파울로 코엘료가 가르쳐주었다.
무엇보다 책을 읽을 때는 어딘가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혼자가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겪을 때도, 인생의 굵직한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나와 함께 해준 작가들 덕분이다.
"4월 1일부터 도서관으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제가 된 건가요?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한 지 3년 차, 나는 초등학교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사서자격증이 없지만 자원봉사자로 근무가 가능한 건 여기가 제주 시골마을의 작은 학교이기 때문이다.
작지만 소중한 활동비도 받는다.
경력단절여성이 된 후로 어떤 곳에 소속되어 처음 하게 되는 출근이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다 육아휴직을 한 후 아이를 키우고 싶어 퇴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오롯이 주부로 엄마로 살아왔다. 3살 터울의 남매를 낳고 길렀고, 출퇴근이 없는 집안일을 했고, 대부분의 주부들이 그렇듯이 업무 강도에 비해 성취감과 자긍심은 혼자서 열심히 찾아야 했다.
그렇다고 지난 선택을 후회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두 아이가 내 품에 안겨 젖을 빨던 순간, 내 눈을 바라보며 '엄마'라고 처음 불러주던 순간, 첫걸음마...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살면서 누린 가장 큰 행복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우리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일을 시작했다. 그 시절을 엄마는 '먹고살기 바빴다' 는 말로 표현한다. 엄마는 우리가 '먹고사는데' 부족함이 없게 최선을 다했지만, 그 시간만큼 살뜰하게 우리를 돌 볼 시간은 부족했다.
나와 동생은 비 오는 날 비 맞고 집에 오는 게 당연했다.
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와 다퉜던 날도, 상장을 받아왔던 날도 엄마는 집에 안 계셨다.
어느 추웠던 겨울날, 후끈한 아랫목에 들어있던 손으로 하교하던 내 얼굴을 비벼주던 엄마의 쉬는 날이 가장 기분 좋았던 기억이다.
그래서 나는 숙명처럼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내가 꿈꾸던 가정 속에서 나의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으로 내 어린 시절을 치유받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점점 커갈수록 문득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도 커졌다.
여러 번 많은 일에 도전했지만, 변변한 성취는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평소 좋아했던 곳, 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는 사서직에 지원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에 일하고 하교시간에 함께 퇴근한다.
방학 때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인생에서 어둠의 터널을 걷고 있을 때마다 나를 일으켜준 건 책과 도서관이었다.
이번에도 또다시 도서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학교도서관 사서직은 책과 아이들을 좋아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도서관에 출근하면서 가장 큰 즐거움은 이 일이 보람 있다는 것이다.
찾고 있는 책을 찾아주면 보물이라도 얻은 듯 기뻐하는 아이,
복도에서 만나면 내 손을 잡으며 '도서관 선생님~' 하며 웃어주는 아이,
동네에서 제일 친절한 사람으로 학교 사서 선생님을 뽑았다며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나를 그린 그림을 보여주러 오신적도 있다.
날이 더워지자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에어컨이 빵빵한 도서관 문을 열며 "아~ 여기가 천국이네~" 하며 들어오는 아이와 미소를 나눈다.
나는 매일 천국으로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