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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노랑 Apr 22. 2024

오일파스텔#1. 똥손도 할 수 있는 오일파스텔

오히려 투박함이 매력이 되는 곳

그런 날이 있다. 분명 이번 주말은 아무것도 안 하고 숨쉬기만 할 거야라고 다짐했지만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자니 괜히 아까운 그런 날. 하지만 그렇다고 챙겨서 나가기는 귀찮고 또 거창한 건 부담스러운 그런 날. 이럴 때 나는 책장 한편에 꽂혀있는 스케치북과 오일파스텔을 꺼낸다.


살면서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적은 없다. 초등학교까지는 그럭저럭 잘 그렸던 것 같은데 중학교를 가면서부터는 미술학원을 다녔음에도 영 실력이 나아지지 않았다. 단짝 친구와 집 앞 작은 화방을 다녔었는데 하루는 선생님이 샤갈의 ≪나와 마을≫ 따라 그리기를 시키셨다. 그리고 그 달을 끝으로 난 미술학원을 관뒀다.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친구가 따라 그린 그림은 정말 샤갈의 그림과 거의 비슷했던 반면, 내 그림은 꼭 얼기설기 조각보를 기워놓은 모자이크 같았다. 게다가 소와 사람의 옆모습의 비율이 원작과 전혀 맞지 않아 ≪어딘가 억울한 나와 마을≫이었다. 친구 그림과 내 그림을 나란히 두고 엄청 웃었던 기억이 난다. 미술은 보고 따라 하는 것조차 어려운 영역이었다.


이렇게 소질 없는 내가 오일파스텔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오일파스텔의 매력이 바로 투박함에 있기 때문이다. 섬세한 묘사와 디테일한 채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파스텔 특유의 넓은 채색면을 활용해 툭툭 선 같은 면, 면같은 선을 긋는다. 뭉툭한 터치가 본래 칠하려던 궤도를 벗어나도 상관없다. 오히려 정형화되지 않은 그 서투름이 오일파스텔의 '무드'이다.


개인적으로 오일파스텔은 사실적 묘사보다는 덩어리째 그리는 '느낌'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너무 잘하려고 애쓰면 어색하다. 말 그대로 과감히 툭툭 던지는 터치에서 그 느낌이 살아난다.

뭔가 대충 그린 것 같은데 멋있어, 알록달록 귀여운데 또 거친 맛이 있단 말이지.


아니, 듣고 보니 투박하고 서툴기만 하면 그게 어떻게 완성이 된다는 것일까. 여기서 오일파스텔의 두 번째 매력이 튀어나온다. 정말 놀랍게도 이 정처 없는 선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어느새 하나의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미적 감각이 없기 때문에 오일파스텔을 할 때 늘 유튜브 강의를 보며 따라 한다. 처음에 썸네일만 보고 '오 멋진데?' 싶어서 그림을 시작해 보면 이렇게 하다가 완성이 되긴 하는 건지 싶을 때가 많다.


특히 얼마 전에 그린 밤바다 그림은 여러 가지 색을 여러 번 짧게 짧게 터치해서 달빛이 바다에 비치는 모습을 그려냈다. 처음 채색한 색깔은 노란색. 유튜브 영상에서 가운데 부분을 중심으로 슬쩍슬쩍 터치를 하는데 이게 나중에 어떤 부분이 되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텅 빈 도화지에 노란 짧은 선들만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모습. 하지만 노란색에 뒤이어 보라색, 남색, 파란색, 흰색이 켜켜이 쌓이더니 일렁이는 밤바다가 완성되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라는 속담처럼 오일파스텔은 이 작은 터치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탄탄하고 풍부한 그림이 된다. 처음에 칠한 노란색이 다른 색을 올리는 동안 사라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잘 쌓아둔 노란 배경 위에 색들이 어우러지며 달빛이 비치는 부분과 아닌 부분이 확연히 티가 났다. 티끌 모아 태산이 오일파스텔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오일파스텔에 점점 매료되고 있는 본인을 발견할 것이다. 똥손도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예술이라니.. 아마 누군가는 벌써 오일파스텔 재료가 얼마나 하는지 검색해 봤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결정적인 쐐기를 하나 날려줘야겠다. 바로 마지막 매력, 이 과정에서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덧칠하고 쌓아가는 미술이다 보니 앞서 잘못 칠한 부분이 있더라도 다음 채색 때 얼마든지 덮을 수가 있다. 물론 덮는 과정에서 색깔이 섞이기도 하고 본래 작품과 다른 느낌이 나올 수 있지만 첫 번째 매력인 '투박함'으로 이는 얼마든지 상쇄된다. 오일파스텔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호수와 튤립 꽃밭 그림을 그리던 중 튜토리얼을 제대로 안 보고 오버한 나머지 생각보다 많은 영역에 짙은 파랑을 칠하게 되었다. 이미 칠했는데 별 수 있나. 그것보다 한 단계 밝은 하늘색으로 열심히 덮었다. 흰색도 살짝 올리기도 하고. 그 결과 본 작품은 오후 2시쯤 햇살이 내려앉은 호수였지만 내 작품은 저녁 7시의 해가 꼴딱 넘어가기 직전의 호수가 되었다. 내심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다음 날 엄마가 내 그림을 보더니 말했다.


'와, 이거 지금까지 중에 제일 잘 그렸다!'


역시 정답이 없는 오일파스텔의 세계이기에 무엇이든 정답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집에 하나 둘 오일파스텔 그림이 쌓여간다. 엽서보다 조금 큰 크기로 스케치북을 잘라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벽에 마스킹테이프로 붙이면 근사한 인테리어 소품도 된다. 요즘은 따로 그림 코팅을 해서 편지지로 사용하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이다. 받는 이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고 그 뒤에 편지를 써서 준다면 정말 낭만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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