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떠나던 날은 이제 시작하는 봄의 햇빛이 병실을 비추던 따뜻한 한낮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따뜻한 봄 햇살이 아직도 미처 가시지 않은 겨울의 기운을 머금은 찬 바람속에 비춰지는 날이 오면 남편이 아주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남편은 우는 저를 보면서 말을 할 수 있었던 그 순간까지 "나 안죽어."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이 정말 혼미해지던 어느 날.
물 축여주려 입을 벌려 보라고 말하는 제 말도. 그 누구의 말도 알아듣지 못하던 세상 하직 2일 전 날. 남편의 상처투성이 차가운 손을 어떻게든 따뜻히 해보려 손을 매만지며 소리없이 울던 나를.. 갑자기 남편은 눈을 떠서 보았습니다.
"왜 울어." 그러고는 정말 순간적으로 저를 확 안아 주었습니다. 그게 남편과의 살아생전 마지막 포옹이었습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갑자기 "어 정말요? 너무 좋아요." 라고 허공을 응시하며 말하더니, 그 이후부터 저도 모르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한 모양입니다. "아멘.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그 말들을 20분 정도 계속 하고는 또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남편의 믿음이 한 번도 신기하게 땅에 떨어져본 적이 없어서. 막판에는 다 나으면 닥칠 현실 문제들을 얘기해도 하나님께 맡기는 거라고 말하는 남편을 만났기에 저는 남편이 천국에 갔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간의 믿음에 대한 남편에게 온 보답일거라 생각합니다.
그 혼자만의 기도를 하던 날. 새벽에 "엄마" "엄마" 엄마를 5번을 불렀습니다. "오빠 엄마 만났어?"라는 제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남편은.. 아마도 엄마를 만났을 것입니다. 세상 하직 때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시어머님과 급작스런 이별을 한 남편은, 저와 결혼 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랑하는 엄마의 천국 마중을 그렇게 받았나봅니다.
살아서 꼭 망고 슬러시를 마시고 싶다고. 그게 회복의 일차 목표라고 하며. 수박 주스도 먹고 싶다던 남편을.. 산소호흡기를 끼고 물을 넘기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저는 아무것도 주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물 한모금 조차도 1주일 가까이 넘겨보지도 못하고 그저 마시고 싶은 그 마음 하나로 인내하며 참으며 병상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천국에서 마음껏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병원에서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버님" 하고 남편을 부르고, 저에게 "아버님 간호하느라 힘들겠다"라고 말할 때 마다. 남편은 이제 47살이고, 불과 1년전만 해도 나와 같이 여행을 갔고. 그 누구보다도 건장하고. 무슨 일을 만나도 긍정적이고 재밌게 해보려 한 50살에 이르지 못한 청년인데 왜 다들 아버님이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입관을 하러 가서야 사람들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남편은 갑자기 순간 속도로 시간을 이동한 듯 90세를 넘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이렇게 아프고 힘든 남편을 내가. 내가.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참 몰랐구나. 그저 내 눈에는 예쁘기만 한 남편이어서 누가봐도 너무 힘들고 아픈 남편을 직시하지 못한 내가 그제서야 보였습니다.
남편은 마지막 병원 입원한 10일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아프다는 말을 죽기 전날 2번 했습니다. 그 이후는 신음 소리만 간헐적으로 울리고 의사표현을 잘 못해서 그냥 지레짐작으로 아픈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의료진에게 말해 마약을 높여 처방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웃고. 고맙습니다. 라고 조무사 선생님에게도 간호사 선생님에게도 꼬박꼬박 말하고, 나는 치료받고 살아날거라고.. 그 흔한 눈물도 흘리지 않고 보냈는데. 췌장암 환우 대다수는 사실 극심한 고통의 마지막인 경우가 많은데, 이 사람은 늘 그렇듯 그 아픔도 인내했고, 그래서 아마도 하늘에서 이 사람의 고통을 줄여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이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게 조용히 세상을 떠나서 참 다행이다. 마음에 안도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떠나던 날 저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남편에게 아침에 "이렇게 살아서 나에게 얼굴 보여줘서 고마워"라고 말하고 얼굴을 쓰다듬고 볼 뽀뽀를 해주었는데. 그게 어쩌면 남편이 저에게 마지막까지 해 줄 수 있는 시간의 최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씩 호흡을 전혀 안하기 시작하던 1시간 전. 급히 직장에 있던 남편 동생분에게 임종이 머지 않은 것 같다고 빨리 오라고 급히 호출을 했습니다. 아주 급히 모든 수단을 다해 와도 약 1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그 때 부터 남편의 호흡이 떨어지면 남편의 몸을 계속해서 흔들었습니다.
흔들어도 숨쉬지 않으면, 귓가에 대고 크게 말해줬습니다. 오빠. 오빠가 세상에서 그렇게 걱정하던 오빠 동생 오고 있다고. 숨 쉬어. 후! 후! 그러면 남편은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모든 힘을 끌어모아 숨을 쉬었습니다.
1시간을 그렇게 동생 만나야 한다고 침상에서 남편을 흔들고 흔들었습니다. 이윽고 동생이 와서 동생과 30여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남편은 저와 동생의 숨쉬라고 몸을 흔드는 손에도 고개를 늘어뜨리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남편과 약속을 했습니다. 남편 간호가 너무 힘들고, 제가 할 수 있는 간호의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이 왔을 때는 수액도 맞을 수 있게 병원에 들어가자고 했는데. 남편은 같이 병원에 들어가려는 제 마음도 모르고- 자기를 버리려는 거냐고 했습니다.
난 한번도 남편을 버린 적이 없다고 내가 언제 오빠 떠난 적 있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그제야 맞다고 했습니다. 나 오빠 끝까지 내가 옆에 있겠다고. 나 오빠 안버린다고 약속에 약속을 했습니다.
10일 조금 넘게 병원에 갇혀있다 장례식장에 또 갇혔습니다. 그래도 남편을 부모님 옆에 안치시키는 그 날까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 지키기 위해. 나의 최선을 다해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병실에서도 남편에게는 침대가 작았습니다. 가끔 남자 간호사나 조무사님 2-3분이 오시면, 남편의 몸을 들어 저 침대 끝까지 남편의 몸을 이동시켜서 올려놓아도 남편은 다리를 다 뻗지 못하고 그 불편한 시간을 견디어 냈습니다.
남편의 시신을 옮기시는 분들도 키가 참 크다고 했습니다. 남편의 유해를 옮기는데 들 것에 머리가 다 들어가지 못해 남편의 머리를 제 손으로 받쳐 같이 이동했습니다.
시부모님 옆 자리에 부부단에 남편을 안치했는데.. 남편이 좁았던 병실 침대 생활에서 벗어나서 유해라도 넓고 쾌적하게 있게 되어 그리고 부모님 옆에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금요일 퇴근 시간이 다 된 저녁 6시경에야 휴직중이던 회사에 부고가 가고. 저와 남편이 평소 인맥이 넓지 않았고. 화장터 스케쥴 등을 맞추다 보니 장례식장에 있던 시간은 36시간 정도 였는데. 정말 너무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남편을 생각하고 배웅해주러 찾아와주었습니다.
남편이 가는 길이 정말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저는 얼굴조차 잘 모르는 분들이 와서 남편을 그렇게 애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지인과 부모님의 지인들도 해외에서 출국하자마자 공항에서 달려온 분들도 있었고, 장례 기간 내리 매일 와서 저의 눈물과 마음을 걱정해주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말 앞뒤 재지 않고 남편의 배웅을 해주고, 남편을 시간내어 기억하고, 세상을 떠남을 애도해주어 진심으로 아주 많이 감사했습니다. 남편은 외롭지 않게 초라하지 않게 그렇게 떠나갈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없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저를 걱정한 제 동생이 저와 한 달을 이 집에서 같이 있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보다는 덜 무너지고 있지만. 그래도 남편의 흔적이 담긴 빈자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를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남편이 막판에 누워있던 거실 큰 창가 옆 렌탈한 환자 침대와 문 입구에 있던 휠체어. 그리고 수많은 진통 마약들과 배액관 소독 용품들 등.. 남편이 많이 아팠다는 걸 알려주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오자마자 그 물건들을 정신 없이 정리했습니다. 다른 건 그렇다 해도. 남편이 아팠던 흔적이 있는 물건들이 가장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할 줄 몰랐는데.. 그게 견딜수가 없어 자정에 이르도록 동생의 도움을 받아 할 수 있는 한 치울 수 있는 한 투병했던 물건들을 급히 정리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던 첫 날. 늘 저를 불러서 물을 달라고 하거나 침대 자세를 바꿔 달라하거나 주물러 달라 하던 오빠 호출에 늘 깨던 새벽 3시쯤 눈이 떠졌습니다. 10여일을 넘어 처음으로 밖을 나가보았습니다. 장례식장 바깥 그 곳들은.. 남편이 저와 스텐트 교체나 항암치료로 입원한 기간 중에 건강해지자며 산책을 하던 그 곳이었습니다.
한산한 새벽 밤에.. 그 곳을 걸었습니다. 이윽고 산책하던 공원 벤치에 다다랐을 때 마음속에서 참을 수 없는 외침이 나왔습니다. "오빠. 내가 너무 보고싶어. 너무 보고싶어. 너무 보고싶은데. 나 어떻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악다구니를 쓰며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보니. 까치 떼들인지 까마귀 떼들인지 자신들과 같은 검은 옷을 입고 자신들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저를 내쫒으려는지 갑자기 여러마리가 모여들어 소리를 질러 저를 그 곳에서 내쫒았습니다.
남편이 투병기간 10개월 남짓 쓴 큐티 노트 겸 일기가 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 그 일기를 열어보았습니다. 일기에는 성경 구절과 함께 얼마나 치유받고 나을 것임을- 저희 둘 뿐이지만 이 가정이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기도한 남편의 기록이 남아있었습니다.
아파서 말도 못하고 무섭고 힘들었던 마음의 기록도 있었지만. 가장 많은 개인의 고백은.. 오빠의 아내인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였습니다. 오빠의 동생의 마음 아픔도 이해하고 보듬어 주려한 남편의 걱정이 있었습니다.
입관시 본 남편의 유해에서 저는 췌장암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췌장암이 남편을 어떻게 잠식해갔는지. 우리는 얼마나 오만하게 우리가 췌장암을 이겨낸 기적의 증거가 될거라고 했는지. 오히려 그래서 남편 몸이 화장될 때 남편이 관이 들어가고 주사를 주렁주렁 달고 피조차 제대로 돌지도 나오지도 않는 고통스러웠던 몸이. 그 아픔의 흔적이 췌장암 세포들이 태워졌을거라는 생각에 하늘에서 시원해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제 마음속에는 설명되지 않는 물음들과 원망들과 상처들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3년에서 5년 정도 되야 이 상처를 담담히 받아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너무 남편이 보고 싶어 죽고 싶다는 생각도 안해본건 아닙니다. 살아 남아 있는게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남편이 제가 행복해지기를 바래서. 살아보려는 노력의 90% 이상을 저를 위해 했고, 그 고통을 참고 견디며 저에게 웃어줬던 걸 생각하면. 제가 슬퍼하면서 살면 남편의 노력이 헛될것 같아 딛고 일어서보려 합니다. 남편이 적은 일기에는 -
"세상엔 시간이 필요한 일. 자연스레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이 많다는 걸. 오히려 그 기다림을 더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는 걸 이해할 날이 오겠지.."
어머님 마지막 정리를 하면서 서로 다투던 어느 날 저에게 남긴 저 일기 말처럼. 이제 저에게 그걸 이해할 날이 오려나 봅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밖에 햇빛이 비치는 시간에는 잔잔하게 햇빛 가루 사이로 남편이 저를 손닿는 거리보다는 좀 더 높은 곳에 은은한 남편의 흔적같은 가루가 저를 쫒아 다니는 것 같습니다. 밤에는 밤의 공기 사이로 남편이 저를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공기중에서 저와 같이 호흡해주는 것 같습니다.
전에 일기를 쓴 것처럼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아.. 이제 남편의 살았던 흔적들을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정리해야하는 일들이 남아 당분간은 바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배웅오신 분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드렸기도 합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어떤 적막과 어떤 기억이 절 찾아와서 덮칠까 무섭고. 남편의 투병기간동안에도 저는 사람들이 선의로 아무리 시작했어도 깊은 곳에는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다른 동기로 저에게 상처주는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건 저도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 상처들을 더 용납하고 살아가면 제가 힘들 것 같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뀐- 제가 선택하려고 해본 적도 없는 저의 사회적 상태 변화로 저도 세상에 적응해야하는 숙제가 남아있습니다.
몇몇 분들이 저에게 자꾸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내 기억속에서 이 세상속에서 사라진다는 걸까. 그게 가능할까. 생각했는데. 그게 "살아진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살아진다고 합니다. 사라져서 살아지게 되는 걸까요.
제 동생말이.. 남편이 와있는 기간 동안 제가 그리고 저희 가족이 너무 행복했어서 그런지 형부가 따뜻한 봄날에 잠시 찾아온 나비가 포르르 날아가는 것만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따뜻했어서 그런지 남편이 세상에 없는 지금이 꿈이 아니라 남편과 행복했던 그 때가 꿈을 꿨던 시간들 같습니다.
내가 너무 사랑하고. 내가 너무 보고싶어. 오빠. 고마웠어. 오빠. 오빠의 바램대로 내가 살아보려 노력할께.
그 동안 남편과의 일을 읽으면서 저와 남편을 응원하고 공감해 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바램은 혹 암투병 중인 누군가가 있다면 꼭 건강해져서 삶으로 돌아가기를 마음 깊이 기도하고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암 치료제가 특히 췌장암 치료제가 속히 나오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카테고리의 글은 조만간 묶어서 별이 되어준 시간 2편으로 해서 브런치 북 마무리를 짓게 됩니다. 이 다음부터는 삶으로 들어가는 저의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을 오래간만에 댓글 창을 엽니다. 제가 답장을 드릴 계획은 없으나 혹여 저의 남편에게 가는 길 애도해주시는 분 계시다면 남편에게 전하고 싶어 열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