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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련나무 May 03. 2024

5. 미리, 알았더라면

미리, 알았더라면 그 삶을 살아갈까.

당신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인가?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말이다.


나는 미리 줄거리와 결론을 읽고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줄거리와 결론을 알고서도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꼼꼼히 보는 편이다. 심지어는 봤던 드라마를 여러 차례 반복해 보기도 한다.


별스럽긴 하지만, 그게 나의 스타일이다. 미리 줄거리와 결론을 보는 이유는 조마조마한 그 순간이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리 알고 보면, '아- 이게 결론이 이렇게 나니까 여기서 무섭지 않아도 돼.' '이 부분은 나중에 이렇게 되니까 뒤에 어떻게 되나 더 살펴보면 돼.'라는 생각을 해서 편안한(?!) 시청이 가능하다. 나는 그렇다.


그런 긴장의 순간- 궁금한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진정한 영화와 드라마를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모든 장면 장면을 다 보는 사람들이 감독의 의도대로, 작가의 의도대로 작품을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마치 탄산이 사라진 사이다를 마시는 것 같이 결말을 미리 보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지만, 그래도 큰 불만이 없다. 오히려 그게 나에게는 작품을 즐기는 방법이다. 좀 특이하긴 하지만 말이다.


며칠 전, 문득 내가 남편과의 이러한 이별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결혼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 후회가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현재에서 타입 슬립(?)을 해서 과거로 가면, 다들 아묻따 삼성 주식을 사서 묻어두는 것이 드라마의 단골 레퍼토리 이기도 하니까.


내 인생 전체로 보아서는 그다지 다시 돌아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강인하지 못하고 밝은 아이가 아닌 나에게는 삶이, 아주 보통의 삶이었다 해도, 나에게는 참 씁쓸했다. 다시 먹고 싶은 초콜릿은 아닌 쓴 초콜릿의 삶이었다.


그 와중에 기적같이 남편을 만나 결혼이란 걸 했다. 결혼을 하면 고생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만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물론.. 다투기도 하고 어려운 순간들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비교적. 나와 잘 맞고 서로를 이해하는- 이해하려는 두 사람이 만나서 살았었기에 전반적으로는 참 행복했다.


어찌 보면 내 몫에 넘치는 행복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빨리 사라진 걸 보면 말이다. 나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남편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했는지 알고, 아픔을 참았는지 알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저 어쩌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그립고, 그 시간이 지속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이건 쉽게 말해. 그리움이다. 보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별한 지금의 시간이 힘든지 모르겠다. 너무 달콤한 초콜릿 같은 인생이 사라졌으니까.


예전에 쓴 글에 보면 C.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 이야기가 있다. 나는 결국 그 책을 샀는데, 책이 너무 얇아서 놀랐다. 근데. 문장의 깊이는- 글의 깊이와 고찰은 얇지 않았다. 그 책을 보게 된 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한 달 즈음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인지, 작가도 그즈음의 일기를 쓴 상태였다. 아내를 암투병으로 잃고 보낸 지 한 달쯤의 상태에서 쓴 글이었던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내 마음과 같아서 놀랐다.


남자인데도, 과거 시대의 사람인데도.. 그 아픔의 묘사는 같은 아픔은 시대를 지나도 무뎌지지 않음을-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거기에도 얼핏 스치듯 그런 문장이 나왔던 것 같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참 놀랐다.

내가 생각한 건 내가 뭔가를 기다리는 매일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가 뭔지는 나도 모른다. 근데 무언가를 매일매일 기다린다.


사라진 사람의 빈자리에는 그 정체불명의 기다림이 남겨져있다.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도 분명히 아는데도 뭔가를 기다린다. 이상한 일이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기다리다니..데도 매일 기다린다. 자동반사적으로.


그 작가도 책 중에 비슷한 말을 했다. 놀라웠다. 그런거구나.. 이 아픔엔 그런 정체불명의 기다림이 수반되는 거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절반 정도도 책을 읽지 못했지만- 중간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런 것이었다. 마가목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가는 것을 보는 순간 왜 하필이면 그것이 우울하게 보이느냔 말이다. 괘종시계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 항상 있었던 어떤 특징이 빠져나가고 없다. 세상이 이처럼 무미건조하고 남루하고 닳아빠진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게 웬일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곳에 남겨진 사람은 그러한 장소에 남겨진다. 그리고 늘 이상하다. 그냥 뭔가 이상하다. 갑자기 사람이 사라진다니.. 사라졌다니..


연락하고 싶어 카톡을 봐도 연락할 수 없다- 보내도 답도 없고, 그 카톡을 보지도 못할 것이다. 어떤 날은 카톡을 보다 생각했다. 만약에.. 천국에 간 사람과 연락할 수 있는 전화나 문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그 메신저는 한 통을 보내는데 얼마의 가격이 부여될까.미래가 얼마나 우리 앞에 다가와야 죽은 사람과 시공간을 넘어 연락할 수 있을까. 멀티 버스(Multiverse)속 그 사람이 아닌- 내가 아는 그 사람으로 말이다.


마음속에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가득가득 마음에 쌓여지고, 그대로 그 편지들이 빠른 속도로 갈변되고 부식되어 마음속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잔해를 남긴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짧은 한 문장 말이라도, 남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매일 남편이 나에게 말하는 그 한 문장의 말이- 남편의 목소리에 입혀 내 귀에 들려지면 좋겠다.


두 번 남편이 나에게 뭐라고 짧게 말을 하는 듯한 환청을 자다가 들었다. 남편이 아플 때, 남편말에 빨리 대답해 주고, 내가 알고 있다고 빨리 해주겠다고 긴장했던 그 모드 그대로 내가 있나 보다. 그 짧은 말에- 나도 모르게 잠결에 "응, 오빠. 알았어."라고 진짜 답을 하고 놀라서 잠에서 깼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너무 생생했는데, 문제는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너무 오랜만에 들은 남편의 목소리에 그저 그리우면서도- 그날 하루종일 눈물이 나면서도 '참 행복한 날이구나'했다.


두 번째 들었을 때는 소리가 애매해서.. 환청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너무 듣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첫 번째 들었을 때의 행복한 날이 기억났다. 두 번째 듣던 날은..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래도. 꼭. 다시 듣고 싶다.


 오늘 무슨 신문기사를 보다 "뉴노멀"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남편이 없는- 나 혼자 있는 삶이 나에게는 뉴(New) 노멀(Normal)이다. 뉴노멀로 가는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이지만, 어쨌든 이 뉴노멀에 난 반강제로 들어와 있다.


이렇게 슬픈 현실을 알면서도- 앞으로 남편이 없는 날이 같이 한 날 보다 더 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난 그 사람과의 시간을 결말을 알아도 살아가겠다는 걸 보면. 난 줄거리나 결말을 알아도 드라마와 영화를 보는 사람인 것이 맞는 것 같다.


손에 잡히던 시간들이, 순간들이 희미해지고 멀어지는 게, 그래서 더 아득히 그리워지는 게 슬픈 그런 밤이다.


그 사람이 참 보고 싶다. 주책맞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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