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인간적인 고대 그리스의 신들
페허만 남은 헤라클레스 신전을 둘러보고 나서 서쪽으로 이동하자 제우스 신전Temple of Zeus이 나타났다. 계곡 끝에 위치한 이 신전은 험준한 언덕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헤라클레스의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헌정된 신전답게 그 위용이 대단하다. 당시 규모가 가장 큰 도리아식 그리스 신전으로 건설되었지만 완공된 적이 없다고 한다. 길이가 100미터가 넘을 정도로 규모가 워낙 커서 재정적인 문제 때문으로 추측하지만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정치적인 문제나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쓰러진 기둥과 흩어진 돌은 과거의 영광과 그것을 건설한 문명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이 유적은 여전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할 만큼 건축 당시 설계자의 야심 찬 비전을 옅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디오스쿠리 신전 Temple of Dioscuri를 둘러보았다. 이 신전은 그리스 신화에서 카스토르Castor 와 폴룩스Pollux(또는 Polydeuces)로도 알려진 쌍둥이 신 디오스쿠리에게 헌정되었다. 디오스쿠리는 쌍둥이 형제였지만 아버지가 달랐다. 그들의 어머니는 레다였지만 필멸의 존재인 카스토르의 아버지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오스였고 반신인 폴룩스의 아버지는 백조의 모습으로 레다를 유혹한 제우스다. 이를 듣고 있던 최사장님이 또 한마디 던진다.
"제우스의 바람기는 못말리는구먼."
신화에 따르면 디오스쿠리 형제는 재산분배를 놓고 사촌인 이다스Idas와 린세우스Lynceus 형제와 대결하게 된다. 또 이들의 약혼녀인 프뢰베Phoebe와 힐라에이라Hilaeira에게 사랑에 빠져 납치해버린다. 대결 중 카스토르가 이다스에 의해 죽자 폴룩스는 복수로 이다스의 동생인 린세우스를 죽여 버린다. 분노한 이다스가 폴룩스를 죽이려 하자 제우스는 벼락으로 이다스를 공격하여 폴룩스를 구한다. 폴룩스는 제우스에게 자신의 불멸성의 절반을 카스토르에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허락을 받은 그들은 Olympus올림푸스와 Hades하데스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쌍둥이자리 별자리로 변했다. 인간처럼 희노애락을 느끼고
도, 또 그러한 감정에 따라 인간사에 간섭하기도 하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참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투어를 마칠 때쯤 해는 서쪽 바다 아래로 완전히 넘어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차를 타기 위해 다시 차도가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조명에 비친 콩코르디아 신전이 저 멀리 보였다. 일몰 때보다 더 신비스러운 이미지다. 이 외 불의 신 헤이스토스Hephaestus에게 바쳐진 신전Temple of Hephaestus(Vulcano)과 치료를 기원하는 사람이 방문하는 아클레피우스 신전Temple of Aclepius , 추수의 여신 데메테르에 헌정된 신전 Temple of Demeter이 있었으나 멀리 떨어져 있고 시간이 늦어 여기에서 투어를 마쳐야 했다.
이 많은 고대 그리스 유적이 한 곳에 이렇게 많이, 그리고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니 정말 놀랍다. 비록 페허가 된 곳도 있지만 콩코르디아 신전과 같이 잘 보존된 곳이 또 있을까? 그리고 한 장소에 이 많은 신전이 모여 있는 곳은 그리스 본토에도 없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인의 가치와 신념에 대한 독특한 통찰력을 한눈에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아테나 못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 곳 투어를 마치면서 누구든 이곳에 오면 고대 그리스인과 그들의 문화, 그리고 놀라운 그들의 건축적, 예술적 업적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고고학 유적을 넘어 신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존경심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신전과 돌 하나 하나에 제각기 이야기가 담겨 있는 아그리젠토의 '신전의 계곡'은 유럽이 기독교화 되기 이전의 문화를 경험하게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헬레니즘 문화다. 그래서 이들의 신화 속에는 인간이 신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결혼도 하며 자식도 낳는다. 신도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인간과 같이 질투하기도 한다. 이러한 휴머니즘 문화를 간직한 고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통일되고, 그리스 문화는 그가 동방원정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세계로 퍼져 나간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6년 죽자 그의 제국은 내전으로 갈라지고 세력이 꺾이게 된다. 그러다 기원전 146년 로마에 정복되면서 역사에서 잊혀 지게 된다.
2,000년도 넘은 긴 세월 때문일까. 우리는 유럽 문화라고 하면 로마와 중세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기독교 문화를 떠올린다. 이번 '신전의 계곡' 여행은 우리의 경험을 기독교 이전 유럽 문명의 뿌리와 연결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리고 이후 르네상스 운동 등 유럽의 역사에 얼마나 많이 영향을 끼쳤는지 책에서 배웠다. 헬레니즘 문화는 기독교 문화와 함께 현재의 유럽 문명이 있게 한 또 다른 하나의 축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유럽에 출장이나 여행을 다니면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기독교 문화 유적과 달리 접할 기회가 없었다. 여기에 와서 직접 목도하니 경이롭다는 말 외는 딱히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