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장을 나와 티레니아Tirrenia해의 아름다운 만을 따라 펼쳐진 팔레르모 시내로 이동했다.
시내 중심가를 따라 걷다 보니 도시의 넓은 대로, 전통적인 시칠리아 구시가지, 바로크 양식의 명소들이 잘 어우러져 있다. 도시의 두 주요 도로인 에마뉴엘레 거리 Via Vittorio Emanuele와 마퀘다 거리 Via Maqueda가 교차하는 팔레르모 시내 중심에 콰트로 칸티Quattro Canti로 불리는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건물 네 개가 둘러싸고 있다. 이 건물들은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층마다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1층과 2층은 4계절을 상징하는 동상과 함께 분수가 세워져 있다. 3층에는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4명의 스페인 왕 동상이 있고 4층에는 팔레르모의 수호신인 크리스티나Christina, 닌파Ninfa, 올리비아Olivia, 아가타Agata의 조각상이 있다.
기원전 7세기에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이 도시는 이후 카르타고, 그리스, 로마,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831년 아랍인들이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번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라센에 의해 이름이 발하름Balharm으로 변경되고 시칠리아 토후국이 되면서 팔레르모는 지중해의 문화 및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이기간 동안 엄청나게 증가한 도시의 부를 바탕으로 많은 모스크, 정원 및 궁전 등을 지으면서 되며 찬란한 예술과 건축 문화가 꽃피게된다.
콰트로 칸티Quattro Canti 인근에 있는 프레토리아 광장Piazza Pretoria에는 '부끄러움의 샘' Fountain of Shame이라는 분수대가 있다. 팔레르모의 랜드마크다. 1554년에서 1555년 사이 전성기 르네상스 기간에 건설되었고, 조각가 프란체스코 카밀리아니Francesco Camilliani가 디자인했다. 이 분수대는 50개 이상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각 조각상은 Harpy하피, Siren사이렌, Triton트리톤 등 신화 속의 존재와 올림피아의 12신 등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돈 페드로 알바레즈Don Pedro Alvarez 총독이 소유한 토스카나 빌라의 정원용으로 제작되었지만 멀리 이곳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설치가 되었다고 한다.
‘부끄러움의 샘’이라는 별명이 붙은 배경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당시 팔레르모 시당국은 공공사업으로 프레토리아 광장에 과도한 노출의 조각상 분수대를 설치했다. 나체 조각상이 너무 선정적이어서 현지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분개한 사람들은 ‘부끄러움의 샘’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원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악명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의 샘’은 이제 팔레르모의 가장 상징적인 랜드마크가 되었다.
어쨌든 지금은 팔레르모의 유명한 랜드마크가 되었으니 시당국의 의도가 적중한 셈이다. 산 주세페 데이 테아티니 교회Chiesa di San Giuseppe dei Teatini의 돔을 포함한 주변 건축물이 이 분수의 매력을 더하고 있다. 가끔 분수보호대인 철장문이 열려 방문객들이 조각품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열리지 않았다.
'부끄러움의 샘' Fountain of Shame 다음 코스는 팔레르모 대성당이다. 팔레르모 대성당Chathedral of Palermo는 원래 로마 교황 그레고리 1세에 의해 지어진 교회였는데 이후 아랍 지배 시대에는 무슬림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그러다 1185년에 대주교 월터 오파밀(Walter Ophamil)에 의해 대성당으로 다시 개축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 변경, 복원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노르만, 무어, 고딕, 바로크 및 신고전주의 등 각 시대의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건물 외관과 화려한 내부 인테리어는 감탄을 자아낸다. 대성당 안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레데릭 2세가 안치된 무덤이 있다고 한다.
팔레르모 대성당Chathedral of Palermo 팔레르모 대성당 투어를 마치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몬레알레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몬레알레는 팔레르모 시내에서 내륙쪽으로 약 7킬로미터 떨어지져 있는데 구불구불한 몬테 카푸토Monte Caputo 언덕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아래를 내려다 보니 팔레르모 시내를 너머 티레니아해까지 파노라믹한 전망이 펼쳐진다. 언덕 아래로 완만한 경사면으로 내려오다 보니 오렌지, 올리브 및 아몬드 나무가 집들 사이로 빼곡하다. 천천히 걸어 내려 가면서 둘러보는 평화로운 주변 풍경은 사색과 경이로움을 불러 일으킨다.
두개의 인상적인 탑이 양쪽에 있는 몬레알 대성당Chathedral of Monreale에 도착했다. 시칠리에에는 하도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가 많아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몬레알레 대성당도 마찬가지다. Cattedrale di Santa Maria Nuova di Monreale 또는 Duomo di Monreale로도 알려진 몬레알레 대성당은 현재 남아 있는 노르만 건축의 가장 위대한 사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의 건축은 1172년에 노르만계 시칠리아의 왕인 윌리엄 2세에 의해 시작되어 인접한 수도원을 포함한 전체 단지는 1267년에 완공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거치면서 노르만 양식,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이 혼합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윌리엄 2세는 몬레알레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중 신성한 환영을 경험했다고 한다. 꿈에 성모님이 나타나 그 자리에 교회를 세우라고 권유하였고 그 자리에 있던 캐롭Carob 나무를 제거하자 숨겨진 보물이 드러났다. 그 금화가 대성당 건설 자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몬레알레 대성당은 1172에 건설이 시작되었고 대성당의 크기는 길이 102미터, 너비 40미터이다. 건물의 외관은 정교하고 복잡한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맞이하는 방문객에게 경외감을 갖게한다. 내부에 들어서자 그 화려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이 대성당을 노르만 건축의 가장 위대한 사례라고 하는지 이해가 간다. Giovanni Domenico Gagini지오반니 도메니코 가지니와 Fazio Gagini파지오 가지니가 디자인한 이 건물은 코린트식 기둥이 11개의 둥근 아치를 지지하고 있다. 벽과 천장 구석구석을 덮고 있는 비잔틴 모자이크의 화려함은 보물과 같다. 이 빛나는 금박 모자이크는 성경의 장면, 성인, 천사, 천상의 광채를 묘사하고 있다. 남쪽의 대주교 궁전과 수도원 건물은 12개의 탑과 거대한 경내 벽으로 둘러싸여 웅장함을 더해준다. 1547~1569년에는 북쪽에 르네상스 양식의 주랑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유럽의 여러나라의 대성당을 방문했지만 성당내부의 화려함은 여기와 비길만한 곳을 보지 못했다. 신도가 아니더라도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몬레알레 대성당(전형적인 노르만 양식의 천장이 보인다.) 몬레알레 대성당은 시칠리아의 왕 월리엄 2세가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되었는데 굉장히 화려하다. 반면에 대주교 월터 오파밀 대주교가 이에 대항하기 위해 건축한 팔레르모 대성당은 웅장하고 엄숙하다.
11세기 말에 13세기 말에 걸쳐 계속된 십자군 원정 초기에는 왕실의 권력은 교회 권력 아래에 있었다. 교권에 도전하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파문당하자 무릎을 꿇었던 '크놋사의 굴욕'은 당시 막강한 교회 권력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러다 전쟁이 실패로 이어지면서 교권은 차츰 약해지고 전쟁 말기 쯤 부터는 왕권이 교권을 압도하게 된다.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권을 왕권 아래로 굴복시킨 '아비뇽 유수'가 당시 역전된 두 권력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이 두 대성당이 지어지던 시기는 12세기 말인데 하나는 시칠리아 대주교에 의해, 하나는 시칠리아 왕에 의해 서로 경쟁하듯이 지어졌다. 이 시기는 정확히 십자군 원정 200년간의 전쟁 딱 중간 지점이니 교권과 왕권이 거의 균형을 이루던 시기여서 그러지 않았을까. '신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를 두고 끊임없이 대립하고 타협해 온 유럽의 2,500년 역사를 여기에도 목도할 수 있었다.
타오르미나의 고대 그리스 원형극장에서 시작된 이번 시칠리아 여행의 열흘 간 일정은 팔레르모의 몬레알레 대성당 투어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대부의 촬영지 사보카와 포르사 다그로, 한 때 아테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강력했던 폴리스 시라쿠사, 그리고 그 중심 타운 오르티지아, 완벽하게 보존된 로마 유적의 로만빌라 델카살레, 바로크의 도시 노토, 베두라 리조트에서 골프 및 휴식,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같은 ‘신전들의 계곡’의 도시 아그리젠토, 그리고 미완성 신전의 도시 세게스타. 그동안 시칠리아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사라센, 비잔틴, 노르만,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로 이어지는 유럽의 역사가 하나의 유적, 혹은 하나의 건축물에 퇴적층처럼 한켠 한켠 쌓여 있는 것을 목격할 수있었던 것은 충격이었다. 아니, 행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여기 오지 않았으면 아무리 글로 읽더라도 그 감동을 느낄 수 없었을테니까.
200여년 전 우리와 비슷한 여정으로 시칠리아를 여행한 괴테. 그는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서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가 느꼈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