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나 화산 지프투어, 벨레델보브 분지
타오르미나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7시쯤 호텔 레스토랑으로 올라 갔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카타니아와 메시나Messina 사이의 해안선 중간쯤 있었다. 어제 갔던 그리스 원형극장 아래의 절벽위에 지었는데 바다를 내려다보는 풍광이 빼어났다. 시내에서 원형극장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중턱에 있는 호텔 정문을 통과해 실내에 들어가면 로비를 지나 프론트가 나온다. 이 층에는 로비와 프론트 외 레스토랑만 있다. 객실은 모두 로비 아래층에 절벽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지어졌다. 2017년 개최된 G7 정상회담 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투숙한 호텔이라고 한다. 뒤에 보이는 원형극장이 당시 정상들 앞에서 정명훈이 라스칼라를 지휘하면서 카바렐리아 루티스카나를 연주했던 곳이다.
레스토랑 실내에는 테이블과 함께 뷔페가 차려져 있었고 건물 바깥의 널찍한 베란다에도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베란다에는 짙고 옅은 분홍색과 빨간색, 그리고 보라색의 화려한 각종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해안 절벽의 경사면을 빼곡히 덮은 초록 수풀 사이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군데군데 서 있다. 그리고 그 아래 해안선을 따라 죽 늘어선 지중해풍의 빨간 기와집들, 저 멀리 수평선까지 이어진 코발트색 바다, 수평선 위에 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청명한 하늘은 자연과 인공이 잘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다.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진다.
아내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웨이트리스가 야외에서 식사할 거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베란다 한쪽 코너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한다. 일행 중 우리 부부 외에는 아직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다. 네댓 명의 다른 투숙객들도 모두 야외에 앉아 있다. 이 좋은 날씨와 경치를 두고 실내에서 식사할 사람이 있을까? 커피를 시키고 경치를 구경하고 있으니 우리 일행의 다른 부부들도 하나 둘 내려왔다. 마침내 우리 일행 8명은 모두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야외의 다른 테이블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찼다. 이후에 내려오는 사람들은 실망스런 표정으로 실내 테이블에 앉았다. 아침 뷔페 차림은 여느 호텔 레스토랑과 비슷하다. 각종 주스와 빵, 그리고 햄, 치즈, 훈제 연어, 엔초비가 차려져 있었다. 조금 특별하다면 각종 시칠리아 토종치즈들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양젖으로 만든 토종 치즈인 페코리노시치리아노Pecorino Siciliano는 숙성치즈라 냄새가 강하고 짜다.
리코타 살라타Ricotta Salata도 양젖으로 만들지만 숙성하지 않아 맛이 부드러운데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우유로 만든 리코타 치즈 맛과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고소하고 달콤한 맛의 라구사노Ragusano는 모짜렐라와 비슷하고 훈제향이 나는 프로볼라아 퓨미카타Provola Affumicata, 톡 쏘는 맛이 나는 카시오카발로 실라노Caciocavallo Silano도 있었다. 우리 부부는 에그베네딕트를 시켰고 다른 일행은 오믈렛이나 보일드에그를 시켰다. 보일드에그를 시킬 때는 꼭 몇 분 삶을 건지 물어보는데 3분은 너무 무르고 5분은 너무 완숙이다. 이틀간의 시행착오 끝에 만족한 결과는 떠나는 마지막날 얻을 수 있었다. 4분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나니 옆 테이블에 앉은 60대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말을 건다. 한국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런 분위기에 취하면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싶은 걸까? 옷차림을 보니 미국인인 듯했는데 역시 콜로라도에서 왔다고 한다. 나는 옷차림을 보면 미국인인지 유럽인인지 대충 알 수 있다. 사람마다 개성이 모두 다르고 세대 간에도 차이가 있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오랫동안 이들과 한 회사에서 같이 일을 해서일까? 아무튼 이들 간에는 내 나름대로 느끼는 차별적인 분위기가 있다. 유럽인들은 유행을 잘 받아들이는 반면 미국인들은 클래식한 분위기에 익숙하다. 물론 미국도 젊은 세대는 다르다.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서 그럴까? 아무튼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대체로 평균적인 중산층의 옷차림은 미국인이 더 보수적이다. 옆 테이블의 남자는 친구부부와 함께 여행 중인데 나흘간 시칠리아 여행을 마치고 내일 오스트리아에 음악회에 간다고 한다. 하얀 린넨 셔츠를 입은 그의 말투와 몸짓은 교양이 있고 여유가 묻어난다. 일행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누리는 지금의 여유는 젊었을 때 치열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국 회사에서는 직급이 높을수록 업무량이 많아진다. 큰 회사라도 사장 아래는 전담 비서가 없어 서류나 자료 작성을 모두 직접해야 한다. 임원쯤 되면 업무강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이 호텔에는 미국인들이 많이 보이는데 코로나로 2021년 9월 외국인 입국이 허용되고 나서 처음 맞는 시즌이라 그런 것 같다. 고급 호텔들은 몇 달전부터 대부분 풀부킹 상태였다. 우리는 입국금지가 풀리자 바로 예약하는 바람에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9시30분경 현지 가이드와 함께 호텔을 출발했다. 두 대의 지프에 나누어 타고 에트나 화산 투어를 나섰다. 여전히 활동 중인 분화구를 구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산을 오르며 고도에 따라 각각 다른 수종들을 볼 수 있는 것이 에트나 화산투어의 매력이라고 한다. 에트나산에는 400여개의 분화구가 있는데 우리가 택한 코스는 벨레델보브Valle del Bove 분지가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한참 산을 오르다 가이드가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숲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10분쯤 숲 속을 걸어가니 동쪽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근처에 용암동굴이 있었다. 여덟 명 정도가 들어가면 다음 사람들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크기도 작고 깊지도 않았다. 제주도와 울진의 석회암 동굴을 보아온 우리들에게는 큰 감흥은 없었다.
다시 차로 돌아와 정상을 향해 계속 올라가니 휴게소와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리프트도 있고 스키장 같아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맞다고 한다. 2018년 스키장 위에 분화구가 새로 생기면서 용암이 스키장을 덮쳤는데 천천히 흘러내려 피해는 크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은 해발 2,000미터 정도인데 3,000미터의 정상까지 수많은 분화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면 2,500미터 정도까지 오를 수 있고 가이드를 동반한 트레킹 코스를 택하면 2,900미터까지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일행 중에 허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어 가까운 분화구 주위만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인 전통치즈 농장 방문 때문에 서둘러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