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카에서 <대부> 1편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느낀 진한 여운을 뒤로 하고 <대부> 2편의 배경인 포르자 다그로로 향했다.
점심식사는 가는 길에 간단한게 하기로 했다. 포르자 다그로에 예약된 식당이 있었지만 오늘 묵을 숙소가 있는 노토까지는 길이 멀어 오후 투어 일정을 빨리 마치고 일찍 출발하기 위해서 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 가이드가 괜찮은 식당이 있다고 해서 들렀다. 피자는 시간이 걸릴 것같아 파스타만 시키려다 미리 구워진 피자를 조각으로 팔고 있어 함께 시켰다. 이번 여행의 메인 테마는 역사 기행이지만 미식 탐구도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였다. 일행 모두가 이태리 음식과 와인을 좋아해서였다. 고급 레스토랑부터 소박한 비스트로까지 지금까지 맛본 시칠리아 음식은 현지의 미각을 즐길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비싼 코스 요리이든 간단한 단품 요리이든 나름대로의 개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이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그러한 미각을 충분히 음미할 여유가 없어 아쉬웠다.
구불구불한 길옆에 이어지는 올리브 밭과 감귤 밭을 지나 포르자 다그로에 가까워지자 풍경은 더욱 드라마틱해 진다.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니 바다 냄새, 감귤, 야생 허브 냄새가 어우러진 상큼한 지중해 향기가 가득 찬 공기가 기분 좋게 만든다. 이오니아 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은 이 중세 도시는 좁은 코블스톤 거리, 오래된 석조 주택, 아름다운 교회가 미로처럼 얽혀 있어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느낌을 준다.
영화 <대부>2편의 여러 장면이 포르자 다그로에서 촬영되었다. 어린 비토 안돌리니가 돈 치치오에게 쫓겨 당나귀 바구니에 숨어 도망가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산타 마리아 성당 앞이다. 아버지, 형 그리고 어머니까지 가족 모두를 죽인 돈 치치오의 살해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떠난 그가 돈 꼴레오네가 되어 다시 돌아와 복수하는 장면도 포르자 다그로가 배경이다. <대부> 3편에서 아들의 오페라를 보기 위해 시칠리아에서 재회한 마이클과 케이가 함께 마을을 거니는 장면도 이 성당 앞에서 촬영되었다.
우리가 성당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자 성당계단 앞에 악기를 든 유니폼차림의 남녀가 하나 둘 모여들더니 연주를 시작한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부터 60세가 넘은 노년의 악사까지 어우러진 그야말로 동네 악단이다. 관광객을 위해 영화 속의 악단을 재현한 것일까? 이탈리아 사람들은 가족들 간의 유대감이 깊다. 그 중에서 시칠리아의 전통은 유별난데 이와 같은 작은 시골마을은 말할 것도 없다. 동네악단을 보니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저 사람들은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 부럽기도 하고 아득히 오래전에 두고 온 무언가를 본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다. 어릴 때 방학이 되면 할머니 집이 있는 시골에 가곤 했는데 거기에서 보았던 농악대에 대한 기억이 이 시골악단의 모습과 겹치면서 어릴 때 추억이 떠올라서 일까? 생뚱맞 게 눈물이 돈다.
산타 마리아 성당 앞에서 연주하는 동네 악단의 모습 영화 <대부>2편은 미국과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넘나들면서 두개의 스토리 라인을 보여주는 독특한 구성과 전개를 담고 있다. 하나는 패밀리비즈니스를 물려받은 마이클이 경쟁 패밀리를 무자비하게 제압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조명한다. 다른 하나는과거로 돌아가 마이클의 아버지 비토 콜레오네의 젊은 시절을 거슬러 보여준다. 시칠리아에서 도망와 뉴욕에 도착한 어린 비토 안돌리니는 고향을 성으로 잘못 알아 들은 이민국 직원의 실수로 비토 콜레오네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 정착해서 결혼을 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던 그가 어떻게 범죄조직에 발을 딛게 되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영화 장면의 배경이 된 포르자 다그로는 전반적으로 방문자에게 시칠리아의 풍부한 역사,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도시다. 중세 랜드마크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지역 전통을 구경하다 보면 이 매력적인 마을에는 모두를 위한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작 소설에 나오는 콜레오네 마을이 지금은 예전의 모습과 다르게 많이 변해 버려 대체 촬영지를 물색하던 코폴라 감독도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 보고 싶었지만 산타마리아 성당을 둘러보고 바로 노토로 출발하기로 했다. 포르자 다그로 마을 투어를 마친 뒤 두시간 정도 걸리는 다음 행선지인 노토Noto로 향하는 차에 올라 긴장을 풀고 잠을 청했다. 영화속의 장소에 직접 와서 그랬을까? 잠은 오지 않고 영화를 볼 때 느꼈던 복잡한 감정이 훨씬 더 격하게 다가왔다. 돌아가서 다시 본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강렬한 캐릭터들의 섬세한 감정을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노토에 도착하니 벌써 5시다. 시칠리아 남동쪽에 위치한 노토Noto는 1693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로사리오 가리아르디, 빈센초 시나트라 그리고 안토니오 마차 등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폐허 위에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을 재건하였다. 발 디 노토Val di Noto 지역의 도시들은 유럽에서 바로크 양식이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며 절정을 이룬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가 숙박할 일 산 코라도 디 노토 Il San Corrado di Noto는 해안에서 10km 가량 떨어져 주변이 감귤과 올리브 숲으로 둘러싸인 고급 리조트였다. 전체가 1층 건물이며 모든 룸이 스위트인 이 리조트는 번잡하지 않았다. 방해 받지 않고 고요한 장소에서 세심하고 배려 깊은 서비스를 원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규모가 큰 오래된 농가를 3년동안의 공사를 거쳐 개조했다고 한다. 목가적이고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시칠리아 전통의 색채와 현대적인 최첨단 시설이 조화롭게 어울어져 있었다.
일 산 코라도 디 노토 Il San Corrado di Noto 빌라를 포함한 룸의 전체 숫자는 40개가 되지 않고 모든 룸은 어떤 방향으로든 풀장을 접하고 있었다. 리조트 내 두 개의 풀장 중 하나는 길이가 100m이며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온수 수영장이라고 한다. 이외 스파, 피트니스, 테니스 코트 등 소수 투숙객만을 위한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린풀이 내려다 보이는 각방 거실 창 앞에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선베드가 놓여 있어 거실에서 밖으로 나오면 바로 풀장으로 들어가거나 일광욕을 즐길 수 있다. 객실 내부는 현대적 감각의 고급가구, 원목 바닥과 트라버틴Travertine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유럽의 다른 호텔이나 리조트에서는 보기 드물게 면적이 굉장히 넓다.
룸으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짐을 풀고 잠시 뒤 거실 창 밖에 있는 테이블에 모두 모여 앉아 와인을 마셨다. 모든 룸에서 거실창을 나서면 바로 풀장이라 옆방의 일행들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쌓였던 피로와 긴장이 눈 녹듯이 풀렸다. 우리는 호텔 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고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빡빡한 하루 일정에 모두 피곤한 탓이었다. 노토에서 첫날밤은 그렇게 흘러 갔다. 그 다음 날은 시라쿠사의 오르티지아 시장 근처에서 쿠킹클래스가 예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