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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울새 Mar 19. 2023

매화 마들렌

3월 셋째 주의 마들렌

얼마 전 책에서 봄은 그렇게 곧장 와주지는 않는다는 말을 보았다.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어 기뻐하고 있으면 갑자기 엄청난 한파가 찾아와 또다시 한겨울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한 걸음 나아갔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어렵사리 살이 쪘나 싶다가도 이내 다시 파리하게 시들어 버렸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따뜻한 봄이 오는 건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가 다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낙담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옛사람들은 계절과 마음을 동일시하여 몇 번이나 겨울로 되돌아갈 때마다 시험에 들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인생의 어느 계절을 넘어서려 했을 것이라는 말이 마치 저자가 내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결국 봄은 오겠구나. 그리고 다시 계절이 흐르면 겨울이 찾아오겠지.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지금 찾아온 겨울에 그렇게 슬퍼할 필요가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이 올 것이고 언젠가 다시 겨울이 찾아올 테니까.


그게 계절이고, 그게 바로 삶이니까.


추운 겨울이 끝나지 않을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울부짖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따뜻한 봄날에 다시 올 겨울이 무서워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저 지금은 겨울이고, 지금은 봄일 뿐인 거니까. 한겨울의 찬바람에 너무 눈물지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 아픔이 사라지고 내 생활이 나아지는 건 아니지만, 그냥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지금은 그냥 그걸로 되었다. 나는 제대로 여기 있으니까.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졌다가 다시 조금은 따뜻해졌다. 내일모레면 춘분이니 이제 정말 봄인가 보다. 춘분은 경칩과 청명의 중간에 드는 절기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다. 조선시대 생활 백서 증보산림경제라는 책에 의하면 춘분에 비가 오면 병자가 드물다고 하는데, 올해 춘분에는 마침 비가 예보되어 있으니 내 건강도 조금은 좋아질까 괜스레 기대해 본다.


산책하러 나갔더니 동네 시냇가 곳곳에 새하얀 매화가 피어있었다. 시냇가를 지날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깡총하게 잘린 매화나무 가지들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어느새 새 가지가 자라서 새하얀 꽃과 함께 한껏 다가온 봄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는 매화의 꽃잎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시냇가를 걷다가 꽃송이 채 떨어진 매화가 종종 눈에 보이길래, 지금 이 순간을 마들렌에 담아볼까 싶어서 조심히 주워 집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오늘은 봄을 담은 매화 마들렌을 만들어 보았다.


막상 매화를 주워 오고 나니 몇 송이 되지도 않는 데다 위생적인 문제도 있어서 마들렌 재료로 사용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매화는 장식으로만 쓰고 작년에 담아둔 매실청과 매실주 그리고 서리태를 이용하면 괜찮은 마들렌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리태는 춘분의 절기 음식인 볶은 콩을 생각하며 재료에 포함한 것인데, 콩을 볶아 먹으면 새와 쥐가 사라져 곡식을 축내는 일이 없다는 미신은 요즘 시대에 별 의미가 없게 느껴질 수 있지만, 서리태 껍질을 마들렌 반죽에 갈아 넣으면 새하얀 매화와 나름 괜찮은 대비를 이룰 것 같았다.


매실청에서 건져낸 매실의 알맹이는 아주 곱게 다져 반죽에 섞어주었고, 매실청과 매실주도 함께 더하여 매실 특유의 풍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서리태는 물에 불려서 껍질과 알맹이를 분리했고, 껍질만 따로 모아서 잘 말린 뒤 곱게 갈아 마들렌 반죽에 섞어주었다.



사실 매화 마들렌은 마들렌 자체의 맛보다는 보이는 부분에 더 중점을 두었는데, 거무스름한 겉보기와는 다르게 매실의 새콤달콤한 풍미가 선명하게 느껴져서 맛도 상당히 괜찮았다. 게다가 곱게 갈아낸 서리태 껍질에서도 은은한 고소함이 느껴져서 만족스러운 조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가장 까다로웠던 부분은 사진을 찍는 일이었는데, 계절을 담아낸다는 게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화는 꽃이 워낙 약해서 조금만 거칠게 다뤄도 꽃잎이 다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주워 올 때부터 보이지 않는 계란을 손에 쥔 듯 아주 조심스러웠는데, 식초 물에 씻어낸 뒤 물기를 닦아내는 일까지 매 순간이 난관이었다.


꽃 자체를 마들렌에 고정하지 않고 촬영하려다 보니 제대로 된 사진을 찍어내는 게 훨씬 힘들었는데, 그래도 나름 만족스럽게 봄을 담아낸 것 같아서 조금은 뿌듯했다.


마들렌에도 어느새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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