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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껍질 Mar 15. 2024

할머니의 트루먼 쇼

우리 할머니 이야기

할아버지가 너무 힘드셔, 90이 넘은 노인이 다른 노인을 돌보니 힘든 게 당연하지, 사실 너희 할아버지가 특이한 거야 라는 엄마의 말처럼 다른 누구가 아니라, 전귀석 씨라서 해내고 있는 일들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아픈 할머니를 돌보는 수간호사였다가, 점점 아이가 되는 아내를 돌보는 보모였다가 하면서 젊은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힘들지만 누구와 나누기도 어려운 일들이었다.

앞마당 작은 텃밭에 농사를 지으면서도 자로 잰 듯 모종 간 정확한 간격을 두고 심던 사람, 손주들과 대화 끝에는 항상 나는 하나다, 왜 여기 있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 정신 차리자! 라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단도리하는 사람,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러 간다는 손녀에게 남이 넘어지면 네가 일으켜 세워주면 되지만 네가 넘어지면 못 일어나는 거라며 당부하는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 전귀석 씨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책임감 있고 독립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고단한 삶은 아무리 단단한 마음이라도 흔들어놓는 법이다. 죽고 싶다, 아프다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을버스를 타고 병원을 오가고, 밤에는 자다가 문득 일어나 집 밖으로 슥 나가버리려는 할머니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 했다. 잠시 머물렀던 큰아들의 집에서, 손녀딸에게 힘들다는 생각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요양원에 상담을 갔다가 내 아내인데,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슬퍼서 울면서 돌아왔다고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평생을 산 고향을 떠나 자식들의 집에 머무시도록 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아들 딸들은 요양사를 부르기도 하고 번갈아 부모님 집에 머물기도 하며 방법을 모색했다. 30년대생 노인 두 분이 경험하는 어려움은 자식들에게도 부모 자신에게도 처음 만나는 문제였다.


해결의 실마리는 과거의 인연과 함께 어느 날 문득 찾아왔다.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던 엄마는 우연한 기회로 할머니와 같은 교회를 다니던 집사님이 매일 주간 보호 센터, 일명 노인 유치원을 다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금 더 알아보니, 초등학교 친구가 일하고 있는 돌봄 센터였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공간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법이니, 할머니를 보내보기로 했다. 그렇게 노인 유치원에 방문한 첫날 저기 멀리서부터 할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친구 집사님의 손을 잡고 할머니도 선뜻 센터로 같이 들어갔다고 한다. 복잡하게 엉킨 문제의 실마리가 보이는 반가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매번 평화로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가기 싫다고 땡깡을 쓰는 할머니를 달래서 버스를 태웠다. 그러다가 버특 떠오른 아이디어는 노인 유치원에 가면 나라에서 돈을 준다고 뻥을 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딸기 따기, 사무실 청소 등 수많은 노인 일자리를 거쳐갔다. 직접 일해 돈을 벌어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는 건 할머니의 낙이었다. 일도 참 열심히 해서 딸기 따기는 맨날 일등을 하고 사무실 청소 중에는 사장님이 같은 신 씨라며 혼자 반가워하며 더 싹싹 쓸어주었다.


월에 30만 원씩 준다고, 근데 하루라도 빠지면 안 준다고 너희 할머니한테 하니까 군말 없이 가, 내가 돈도 보여줬어 자네가 다 번거 내가 하나도 안 건드리고 보관하고 있다고, 라며 이야기하는 할아버지는 개구져보였다. 이때부터 할머니의 트루먼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할머니를 데리러 오는 버스 선생님도, 가끔 언니가 잘 있나 보러 오는 이모할머니도, 집안일을 도와주러 오시는 요양사분도 다 같이 입을 맞춰 할머니가 얼마나 좋은 노인 일자리를 얻었는지 이야기했다.

할머니와 키가 똑같은 이모할머니가 성, 나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귀한 노인 일자리야 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감쪽같이 속아서 하루라도 빠지면 돈을 안 준다더라, 하는 할머니가 귀여워서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면 웃으면서도 재밌는 동시에 할머니가 안타깝다고 마음이 찡하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힘드니 할머니가 주간 보호를 가는 게 맞고 또 감사하지만, 엄마가 나이 들어 고생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면 부모 자식의 관계란 뭘까 싶다. 나이가 들어도, 세월이 흘러도 서로가 참 애틋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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