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여름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가 나타났다. 길에서 생활하기에는 너무나 눈에 띄는데다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 어디서 버림받은 게 아닌가 싶었다. 나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똑같이 느꼈는지 다들 이 고양이를 잘 돌보기 시작했다. 우리 아파트 동 바로 옆에 지붕과 담장이 있는, 길고양이에겐 꽤 괜찮은 환경의 분리수거장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거기다가 숨숨집도 마련해주고 밥그릇, 물그릇은 물론 담장 위에 고양이 장난감도 두어서 지나가는 누구나가 고양이와 놀아줄 수 있도록 했다. 고양이에게는 이름도 있었다. 아파트 이름의 첫 두 글자를 따서 '래미'였다. 누가 처음 주도해서 돌봄을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하나 둘 함께 참여하게 되어 마음이 따뜻했다. 이따금 지나가다가 동네 아이들이 래미와 놀아준다고 장난감을 휘두르는 모습, 쓰다듬는 모습, 간식을 주는 모습 등을 볼 수 있었다. 나도 래미를 만나면 아무리 가던 길이 바빠도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안녕, 인사를 하곤 했다. 래미는 사람을 좋아해서 주로 밖에 나와 있어서 출, 퇴근길에 매일 눈에 띄곤 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분리수거장 앞에 래미가 나와 있었다. 여느 때처럼 인사를 하고 귀여워해 주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래미가 나를 따라왔다. 아파트 1층의 공동현관 입구 비밀번호를 치는데 옆에 계속 서있더니 문이 열리자 나를 따라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렇게까지 따라온 적은 없는데... 이게 말로만 듣던 간택인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온 래미 옆에서 망설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래미도 같이 탈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가면 래미도 같이 들어갈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래미를 너무나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 때는 고양이 임시보호를 해 보기 전이라서 경험이 없어 집에 고양이를 데려올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일단 뭐가 필요한지도 잘 몰랐고 그걸 알아볼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냥 분리수거장에 있는 래미의 물건을 전부 가져와야 할 판이었다. 나는 혼자 사는데 그 당시엔 풀타임으로 일도 많이 하고 있어서 데려오게 되면 래미를 혼자 두어야 했다. 지금보다 좋지 않은 환경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여러 다른 사람들의 돌봄을 받고 있는 아이이기에 뜬금없이 사라지게 할 수도 없고. 함께 집에 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나를 따라오는 래미를 밖으로 나갈 수 있게 아파트를 다시 나간 뒤에 잠시 래미를 바라보았다. 어떡하니 너를... 나의 이 한 마디를 래미는 이해한 것 같았다. 내가 다시 아파트로 들어오니 래미는 이해했다는 듯 유리문 밖에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래미를 외면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마음이 돌처럼 무거웠다.
래미는 몇 번이나 이렇게 사람을 따라갔다가 거절당했을까? 자신이 버림받기 전에 살았던 곳, 포근하고 아늑한 집이 그리웠던 것일까? 자신을 잘 돌봐줄 것 같은 사람이 지나가기를 한참을 기다리다가 따라가고 거절당하고. 그랬을 래미를 생각하면 래미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좋은 것만 주고 싶은데, 거절을, 실망감을 주게 되어서.
다행히 래미는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우리 동네에서 자리 잡은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입양이 되었다. 사실 이건 시간이 많이 지나서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래미와 래미의 물건들이 없어져서 어딘가로 입양을 갔겠거니 생각했을 뿐. 나는 래미를 만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친구가 길에서 구조한 아기 고양이를 임시보호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집에 고양이 물품들이 하나 둘 생기고 고양이를 돌보는 법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를 연말에 입양보내고 나는 드디어 내가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아기 고양이를 돌보며 느낀 바가 많아서 나는 다 자란 고양이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래미를 닮은 하얀 엄마 고양이와 아들 고양이를 동반입양하게 되었다. 래미처럼 길에서 생활하던 아이들이었다. 아들 고양이는 길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어쩌면 래미보다도 훨씬 힘든 삶을 겪었을 우리 아이들을 보듬으며 래미에게 주지 못했던 애정까지 쏟아붓고 있다.
어느 날 정기검진을 가기 위해 엄마 고양이를 이동장에 넣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보다 낮은 층에서 타신 어떤 아저씨가 이동장의 투명창을 통해 보이는 흰 털을 보고 반갑게 외쳤다. "어! 얘 래미예요?" 아저씨께서 말씀해주시기를 래미를 주도적으로 돌보던 분이 있었는데 래미를 만났을 때부터 입양처를 알아보고 계셨는지 래미가 금방 입양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어디로 입양을 갔는지는 모르셔서 단순히 흰 털 고양이가 우리 아파트에 있다는 것만으로 래미를 본 줄 알았다고.
래미같은 살가운 아이는 어딜가나 이쁨받을 것이다. 사실 그냥도 예뻐서 조금 도도해져도 괜찮을 것이다. 지금은 입양간 집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 내가 기억하는 꼬질한 모습보다 훨씬 더 예쁜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