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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Sep 07. 2024

내가 좋아하는 사람 vs. 나를 좋아하는 사람

타이밍이란 무엇일까. 연애가 너무 하고 싶던 혼자이던 지난 날들엔 아무도 내 앞에 없더니 이젠 갑자기 두 명이나 나를 좋아한다니. 근데 서로 좋아하는 수준이 비슷하지 않고 둘 다 기울어진 시소 상태. A군은 (본인이 말하기를) 나를 8만큼 좋아하는데 나는 걔를 9만큼 좋아하고, B군은 (내가 느끼기에 ) 나를 10만큼 좋아하는데 나는 얘를 7만큼만 좋아하고. 단짝 친구에게 상담을 했더니 '너는 마음이 엄청 크고 넓어서 좋아하는 감정을 이 사람 저 사람 나눠주고도 남나봐'라는 소릴 들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한 사람에게 올인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감정에 불타올라야 하고 단 한 사람이 내 세계의 전부가 되어야 하는데, 그건 20대가 지나고 나니 불가능해져 버렸다. 20대때는 '진정한 사랑'에 죽고 못살았는데 30대가 되니 꼭 영혼을 바친 사랑이 아니더라도 적당한 호감만 있으면 연애가 가능했다. 주변에서도 선을 봐서 결혼하기도 하고, 온 힘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조건이 우선시되기도 하고. 내 마음을 따라서, 내가 더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한다면 쉽겠지만 결혼을 생각하면 그게 그렇지도 않다. 손뼉도 손바닥 두 개가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않는가? 나만 열심히 좋아하고 달려가도 상대방이 관심이 없으면 그만이다. 반대로 상대방이 내게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면, 내가 그를 조금 덜 좋아할지라도 나도 뛰어갈 의지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떡해야 할 지를 모르겠고, 가끔은 차라리 다시 혼자이고 싶어지기도 한다. 



1. A군

A군은 착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자타공인 '착한 사람'이다. 누군가 원룸 이사를 하면 기꺼이 자신의 차로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고, 크고 무거운 짐을 가지고 출국하는 친구가 있으면 공항까지 차로 데려다준다. 지금 9월인데 올 한 해 공항에 사람들을 데려다 주느라 자신의 휴가 빼고 5번 이상을 공항에 다녀왔다. 그 외에도 생일 파티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파티나 선물의 아이디어를 내고 기숙사에 함께 사는 룸메이트에게 크리스마스 깜짝 선물을 준답시고 신발장에 선물을 숨겨놓는 등 남에게 베푸는 일을 본인이 즐기는 스타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친구가 정말 많고 본인도 친구의 도움을 쉽게 받는다. 애가 칠칠맞지 못한 면이 있어서 그런 점을 친구들이 채워준다. 


친구들에게 정말 잘 하는데 나에게는 더 잘 했다. 주말에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어도 내가 원하면 모임에 가지 않겠다는 식으로도 몇 번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싫어하는데다 A군이 친구가 많은 게 장점이라고 생각해서 늘 무슨소리냐, 나는 다음에 만나면 되지, 모임에 나가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수시로 간식을 사오고(심지어 고양이 간식까지 사온다), 나는 직장인이고 본인은 대학원생이면서 데이트 비용은 거의 본인이 다 냈다. 한 번은 차를 타고 멀리 놀러갔다 오는 길에, 운전을 하지 못해 미안해서 주유비를 내려고 카드를 줬는데 받아 주지를 않았다. 그 외에도 몇 번 주유비를 내주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한사코 거절해서 한 번도 내가 내질 못했다. 휴가 때면 나를 공항까지, 명절이면 서울역까지 데려다주고 짐도 들어주고. 차를 타기 전에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무겁다고 말하지 않아도 가방을 들어주고.


나이답지 않게 어린아이같은 면도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동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기도 하며 유튜브에 올라오는 웃긴 짧은 영상을 정말 많이 본다. 자신이 볼 때 많이 웃긴 건 따라하기도 한다. 키가 2미터 씩이나 되고 덩치가 커서 그런 어린애같은 짓도 오히려 반전 매력포인트로 봐주게 된다.


여름휴가로 가족과 함께 스페인에 다녀와서는 나에게 오만 것을 다 주었다.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올리브유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는데, 올리브유 한 병에다가 스페인 전통 디저트인 뚜론, 발렌시아 대표 건물들이 그려진 마그넷과 모자이크 기법이 너무나 예쁜 냄비받침, 자기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토마토주스와 동유럽 스타일 맥콜인 크바스, 그리고 코코넛 초콜릿을 비롯한 각종 초콜릿까지... 마치 내가 스페인을 다녀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많은 선물을 받았다. A군이 물건을 고르는 센스가 있는 편은 아닌데 여동생, 엄마와 함께 다니며 쇼핑을 해서 그런가 다 마음에 들었다. 무척이나 고마웠다. 이 많은 것을 지구 건너편에서 나를 위해 이고 지고 왔다는 게. 안그래도 친구가 많아서 친구들 것도 사오느라 힘들었을텐데.


A군의 단점은 나에게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A군은 자기 생각에 내가 자기를 9만큼, 자기가 나를 8만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에게 잘해주는 정도로 볼 때는 8 이상인 것 같지만 속마음은 다른가보다. 나랑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다. 진지하게 만나는 거, 결혼 전제로 만나는 거 지금은 관심없다고. 우리는 가볍게만 봤으면 좋겠다고. 전 여자친구가 결혼하자고 하도 졸라서 헤어졌다고. 그래서 우리는 마치 연애를 하는 것 같아보였지만 남자친구-여자친구의 관계는 아닌 상태로 지내왔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친구들에게 가볍게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싫어서 정말 친한 친구들 몇몇 말고는 다 내가 솔로인 줄 안다. 그렇게 두 번째 남자가 나타난다. 친구 사이에서 발전하고 싶어하는 B군이.



2. B군

B군은 유치원 선생님이다. 아이들과 함께 일해서 그런지 인내심이 강하며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 도덕적 기준이 높은 편이고 당연히 본인도 그 기준에 맞추어서 산다. 그런 점이 존경스럽고 본받고 싶다. 선진국 출신이라 차별에도 민감하다. 그래서 B군 앞에서는 인종차별, 성차별, 나이차별을 하지 않게 늘 말조심을 하게 된다. 그 때문인가 B군과 대화를 할 때는 생각을 한 번 더 하게 되고 마음이 아주 편한 느낌은 아니지만, 이렇게 벽이 있기에 오히려 싸울 때 서로의 감정을 덜 해치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B군의 매력은 가정적인 취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요리, 베이킹, 뜨개질, 독서, 드로잉, 식물 키우기, 인테리어 꾸미기... 나도 이런 정적인 취미활동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인데 나의 실력은 그저 그렇다. 남에게 요리를 대접하거나 그림을 그려 보여줄 수준이 안 된다. 그런데 B군은 그 많은 취미를 꽤 수준급으로 해낸다. B군이 해주는 식사를 먹으면 '아, 이런 남편이 있으면 정말 최고겠다'하는 생각이 든다. 튀긴 생선을 넣은 피쉬타코와 닭갈비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는 디저트에도 환장을 하는데 B군은 정말 베이커리에서 팔만한 맛의 디저트를 만든다. 바나나브레드에서 정말 고급스러운 향이 나길래 비법이 뭐냐고 캐물었더니 아몬드 오일을 넣었다고 했다. 브라우니도 쫀득하고 꾸덕하게 잘 구워내고 초코칩 쿠키도 겉바속촉으로 완벽하게 만든다. B군의 가장 자신있는 베이커리는 시나몬롤인데 시나몬 파우더 향과 어우러진 쫄깃한 반죽과 달달한 설탕 토핑은 정말 지금 당장 나가서 팔아도 손색이 없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좋아한 게 B군인지 B군의 음식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자신의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을 나에게 나누어준다는 게 정말 고맙다. 심지어 같이 뭘 먹으면 내가 더 많이 먹는다. B군은 입이 짧은 자기 대신에 내가 잘 먹어주어서 그게 보기 좋다고 한다.


취미 뿐만 아니라 B군은 여러 면에서 나와 비슷하다. 나는 타고난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성량이 작은 편인데 B군도 그렇다. 그래서 둘 다 조용한 장소를 좋아하고 사람을 만날 때도 소규모 모임을 선호한다. 적은 수의 친구와 깊게 친한 것도 그렇고.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 B군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진심으로 기쁘다. 섬세한만큼, 너무나 센스있게 선물을 잘 고른다. 


다만 B군은 모든 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소 부정적이다. 뉴스를 보며 항상 불만을 터뜨린다. 이해는 된다. 그럴만한 기사들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뉴스를 안 보잖아...보더라도 혼자서 보는데. 근데 뉴스 뿐만이 아니라 직장생활에도, 집 앞 공사장에도 불만이 많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취미 활동 외에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게 별로 없다. 하다못해 영상을 함께 시청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일단 나와 B군의 개그코드와 영상 취향이 많이 다르다. B군의 집에는 플레이스테이션이 있는데 함께 게임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애초에 내가 게임을 잘 못하는 데다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있으면 주로 일상을 이야기하거나 요즘 넷플릭스에 넘쳐나는 살인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본다. 밖에서 만나면 전시회를 가고 외식을 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외식하는 데이트는 나는 이제 그냥 그렇다. 너무 시끄러워서 상대방에게 집중이 잘 안된다. B군이나 나나 목소리가 작기도 하고. 어딜 가든 배만 채워지면 당장 나가고 싶어진다.


B군과는 예전에 사귀다가 헤어지고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와서 친구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헤어질 때 나쁘지 않게 헤어졌기에 오랜만에 잘 지내나 궁금해서 보게 되었다. 반 년 이상을, 한 달에 한 두 번 같이 전시회에 가고 게임을 하고 밥을 먹는 친구 사이로 지내서 나는 솔직히 기뻤다. 이렇게 좋은 친구를 하나 얻는구나.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더 발전된 사이,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원하는 B군에게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B군이라는 좋은 친구 하나를 잃을지, 아니면 공식적으로 아무 사이도 아닌 A군을 정리하고 나를 정말 좋아하고 나와의 미래를 계획하는 남자친구를 얻을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그 어떤 사람도 시간을 되돌려 한 번 버렸던 선택지를 다시 선택할 수는 없다.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둘 다 버려야만 한다. 나의 남편이 될 가능성은 낮지만 함께 하는 게 즐거운 A군, 언젠가 나의 조신하고 가정적인 남편이 될 B군.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미리 정답을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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