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아키텍트는 이렇게 지었다.
이야기와 그림
1.
유령-건축가는 어두운 바다에서 표류했습니다. 9일째 되는 캄캄한 밤, 유령-건축가는 저 먼 곳에 희미한 빛을 봅니다. 유령-건축가는 모든 힘을 다해 그 빛을 향해 배를 움직입니다. 한참 후에 유령-건축가의 배는 한 작은 섬에 도착합니다. 유령-건축가는 지친 몸으로 배에서 내립니다. 섬은 축축한 진흙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섬의 바닥은 물컹거리며 조금씩 움직입니다.
2.
꽤 크고 낡은 돌탑 하나가 있습니다. 유령-건축가는 멀찌감치 떨어져 탑 주위를 한 바퀴 돕니다. 물컹거리는 땅 때문에 걷기가 쉽지 않습니다. 탑은 매우 거친 돌들로 쌓아져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탑 안으로 들어갈 만한 어떤 문도 없습니다. 대신 탑에는 탑 위로 오를 수 있는 경사로가 있습니다.
3.
유령-건축가는 그 경사로를 따라 벽에 그려진, 아니 어쩌면 새겨진 그림들을 발견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9개입니다. 누군가가 경사로를 오르며 그것들을 그러 놓은 듯합니다. 유령-건축가는 탑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경사로가 시작되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곳 옆 벽에 단어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 이 섬. 사물의 등에 공간을 위한 장소는 없다 ». 이 탑이 내뿜는 기이함 때문에 유령-건축가는 오싹해집니다.
탑 맨 꼭대기에 멀리서 보았던 불빛이 보입니다. 그 빛을 향해 유령-건축가는 경사로를 오르기 시작합니다. 걷자마자 거친 돌들에 유령-건축가의 발이 베입니다.
4.
힘들게 경사로를 오르는 유령-건축가에게
첫 번째 그림이 말합니다. « 모방하지 않는 자. 당신은 왜 희미한 불빛을 보았습니까? »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계속 경사로를 오릅니다.
두 번째 그림이 말합니다. « 공허를 만드는 자. 당신은 왜 이 섬의 등에 올랐습니까? »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풍요로운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계속 경사로를 오릅니다.
세 번째 그림이 말합니다. « 몸을 척도로 만드는 자. 당신은 왜 이 물컹거림과 함께 걷습니까? »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춤추는 듯한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계속 경사로를 오릅니다.
네 번째 그림이 말합니다. « 투명한 안구를 가진 자. 당신은 왜 이 탑을 돌고 있습니까? »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기쁜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계속 경사로를 오릅니다.
다섯 번째 그림이 말합니다. « 숙고하는 자. 당신은 왜 이 텍스트를 읽습니까? »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많은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계속 경사로를 오릅니다.
여섯 번째 그림이 말합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 당신은 왜 이 그림들을 바라봅니까? »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유명한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일곱 번째 그림이 말합니다. « 짜 맞추는 자. 당신은 왜 불빛을 앙망합니까? »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에로틱한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계속 경사로를 오릅니다.
여덟 번째 그림이 말합니다. « 무한을 가두는 자. 당신은 왜 이 탑을 오르기 시작합니까? »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천상의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계속 경사로를 오릅니다.
아홉 번째 그림이 말합니다. « 운명을 회피하는 자. 당신은 왜 희미한 불빛으로 가려합니까? »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비극적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계속 경사로를 오릅니다.
5.
드디어 탑의 옥상입니다. 탑은 대략 9층 정도의 높이입니다. 난간도 없는 좁은 탑 위에서 유령-건축가는 두려움으로 현기증을 느낍니다. 어둠을 뚫고 그 희미한 빛이 유령-건축가의 눈앞에 다가옵니다. 그것은 이미지입니다. 스스로 빛나는 이미지입니다. « 이것은 빛나는 이미지. L’image radieuse ». 이 이미지에는 맑은 하늘 그리고 잔디로 덮인 대지, 그 사이에 하얀색 작은 집이 있습니다. 유령-건축가는 이미지에서 한 줄의 반투명 검은색 텍스트가 위치와 방향을 바꿔가며 반복하며 빠르게 지나갑니다. 마치 이미지가 유령-건축가에게 그것을 읽으라고 닦달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유령-건축가는 빠르게 지나가는 텍스트를 읽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 우리는 이미지 안 무언가 위에 있다 ».
유령-건축가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 이미지를 만집니다. 유령-건축가의 손 끝에 느껴지는 이미지는 매끄럽습니다. 어떤 완전한 매끄러움, 그 홈 없음 위를 미끄러지듯 텍스트는 아무 저항 없이 유령-건축가의 정신으로 스며듭니다. 그 텍스트는 마치 처음부터 유령-건축가의 생각이었든 것 같습니다. 유령-건축가는 생각합니다. « 우리는 이미지 안 무언가 위에 있다 나는 그것을 안다. » 그때 유령-건축가의 얼굴이 그 이미지에 빨려 들어갑니다. 그의 얼굴의 앞면은 이미지에 살짝 담겨 있습니다. 유령-건축가의 얼굴은 이미지가 내뿜는 광채로 빛나기 시작합니다. 유령-건축가는 눈을 감습니다. 유령-건축가는 빛나는 그리고 매끄러운 이미지 속으로 스며듭니다.
6.
눈을 떴을 때 유령-건축가는 더 이상 섬의 등에 있지 않습니다. 투명한 공기가 유령-건축가를 감쌉니다. 그의 눈앞에 아름다운 마을이 보입니다. 흰색 건물들이 모여 있고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마을을 보고 유령-건축가는 생각합니다. « 이곳은 빛나는 마을이다 » 유령-건축가는 오래전 자기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 한 농부를 회상합니다. « 그 농부는 드디어 이 빛나는 마을에서 일하고 있을까? »
유령-건축가는 그 농부를 생각하며 기분 좋게 걷기 시작합니다. 조금 빨리 그리고 가볍게 걷습니다. 마을의 흰색의 건물들 사이로 다섯 개의 하얀 기둥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기둥들 사이에 투명한 볼륨이 보입니다. 유령-건축가는 생각합니다. « 빛나는 매끄러움이 드디어 건물이 되었구나. 나는 내 눈으로 새로운 건축을 본다 ». 유령-건축가는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7.
갑자기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빠르게 하늘을 가릅니다. 그 소리에 유령-건축가는 고개를 들어 그 새를 바라봅니다. 그의 시선이 그 검은 새에 다다를 때 유령-건축가는 생각합니다. « 검은 새는 새로운 정신. 새로운 건축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한다, » 유령-건축가의 그 말과 동시에 검은 새는 투명한 볼륨 위 백색의 매스 위에 앉습니다. 유령-건축가가 그 새를 자세히 봅니다. 그 새는 부리로 두 개의 원과 세 개의 직선이 물고 있습니다.
8.
유령-건축가는 새로운 정신의 검은 새를 향해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백색의 건물을 만납니다. 건물은 다섯 개의 기둥과 그 뒤에 있는 투명한 볼륨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백색의 매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외피들은 건물의 자유로움을 보여줍니다. 유령-건축가의 눈에 비친 것은 투명한 백색의 빛나는 건축적 이미지입니다. 이 건축의 윤곽이 주는 탁월함에 유령-건축가는 생각합니다. « 이것은 까마귀의 빌라, 빛나는 신정신의 성스러운 공간 ». 유령-건축가는 원통 기둥인 필로티 사이를 지나 빌라 아래에 있는 투명한 볼륨 안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에 경사로가 있습니다. 유령-건축가는 경건하게 그 경사로를 산책합니다. 유령-건축가는 위 거주를 위한 층에 다다릅니다. 유령-건축가는 그 내부의 탁 트인 느낌에 경탄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건축적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9.
벽 들에는 가로로 긴 창들이 있습니다. 이 창들은 건축적 외피의 투명한 부분들입니다. 빛의 도움으로 자연은 이 창들을 통해 내부공간에 투사됩니다. 유령-건축가는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매끄러운 유리에 투영된 자연을 터치합니다. 그의 터치로 자연은 건축세계의 매끈한 이미지가 됩니다. 유령-건축가는 그의 손가락으로 다룰 수 있는 세계를 터치하며 거의 반나절을 보냅니다. 유령-건축가의 안구들은 피곤 해집니다. 유령-건축가는 의자도 침대도 아닌 것에 그의 몸을 누입니다. 피곤한 그의 시선에 하얀색의 벽이 보입니다. 유령-건축가는 곧 잠이 듭니다.
10.
유령-건축가는 어두움 속에서 눈을 뜹니다. 투명한 창을 통해 어두움이 스며들어 빌라 안은 깜깜합니다. 밖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비가 거세게 내립니다. 유령-건축가는 이 불길함에서 벗어나고자 손가락을 뻗어 투명한 창을 다시 터치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매끈한 이미지는 없습니다. 자연은 더 이상 고분고분한 이미지가 아닙니다. 밖에서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유령-건축가는 두려워집니다. 유령-건축가는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렵습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비에 젖은 까마귀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어둠 속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집니다. 동시에 어떤 소리들이 나타납니다. 그 소리들은 명령하는 목소리들. 유령-건축가는 그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들에 이끌려 내부공간 옆 옥상정원으로 나갑니다. 빌라 위 옥상에서 그는 콘크리트로 된 낮은 벽을 잡고 그 목소리들이 나는 곳들을 내려봅니다. 애원하는 목소리, 그 낮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빌라의 네 파사드입니다.
11.
그들은 말합니다.
« 우리는 건축의 페이스들입니다».
첫 페이스가 말합니다.
« 짜 맞추는 자여.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째 페이스가 말합니다.
« 빈 곳을 채우는 자여.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셋째 페이스가 말합니다.
« 이어주는 자여.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넷째 페이스가 말합니다.
« 유령이여.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유령-건축가가 대답합니다.
« 나는 건축가입니다. 나는 짜 맞추며 공간을 만들고 정신과 건축을 이어줍니다. 하지만 나는 유령은 아닙니다. »
네 페이스가 함께 말합니다.
«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소서 »
첫 페이스가 말합니다.
« 짜 맞추는 자로 머물지 말고 쌓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페이스가 말합니다.
« 빈 곳을 채우는 자로 머물지 말고 무한으로 날아가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셋째 페이스가 말합니다.
« 이어주는 자로 머물지 말고 재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
넷째 페이스가 말합니다.
« 유령으로 머물지 말고 건축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
유령-건축가가 대답합니다.
« 다시 말하지만 나는 유령이 아닙니다. 아는 근원을 알고 세계를 짜 맞추어 공간을 창조하는 정신입니다».
네 페이스가 함께 말합니다.
« 우리에게 당신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당신만이 지금 여기서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
12.
유령-건축가가 대답합니다.
« 나는 이곳의 이방인일 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당신들을 도울 수 있단 말입니까? »
첫 페이스가 말합니다.
« 우리는 그저 페이스일 뿐입니다. 우리는 얼굴도 없고 머리도 없고 몸도 없습니다. »
둘째 페이스가 말합니다.
« 우리는 이미지와 문자일 뿐, 우리는 까마귀가 없을 때에만 겨우 목소리를 내고 얼굴을 드러냅니다. »
셋째 페이스가 말합니다.
« 우리는 우리 안을 가득 채운 텅 빔으로 우리는 고통받고 있습니다. »
넷째 페이스가 말합니다.
« 우리는 백 년 동안 이 유령 같은 정신을 배출할 수 없습니다».
13.
유령-건축가가 대답합니다.
« 가여운 네 페이스 들이여! 한낮 이방인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단 말입니까? »
네 페이스가 함께 말합니다.
« 가려주십시오, 이 창들을. 장막 치십시오, 이 유리들을. 이 투명성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도 배출하지 못합니다. »
유령-건축가는 망설입니다. 한참을 생각합니다.
« 빛나는 건축이여. 당신처럼 백색의 순수함으로 존재하기란 쉬운 게 아니군요. 백 년간의 변비라니! »
14.
유령-건축가는 손을 뻗어 내려 네 페이스를 한 번씩 어루만집니다.
« 내가 안에서 그 투명함을 사라지게 하고 장애물들을 채우겠습니다 그것은 음산한 놀이입니다 ».
유령-건축가는 안으로 들어갑니다. 유령-건축가는 모든 옷을 벗고 쪼그려 앉습니다. 유령-건축가는 배출을 위해 온몸에 힘을 줍니다. 유령-건축가는 그의 모든 구멍으로 모든 분비물, 토사물, 배설물을 필사적으로 쏟아냅니다. 유령-건축가는 그 모든 것을 다 쏟아냅니다. 이 배설 때문에 안에서 거주하는 존재자는 깜짝 놀랍니다. 경악한 신정신은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빌라 안이 그 끈적이는 것들로 거의 가득 찰 때 유령-건축가의 몸이 녹습니다. 그 몸은 비정형의 끈적이는 점액에 섞여 버립니다. 마침내 신정신은 자신의 숨을 조정하기를 포기합니다.
순수한 건축의 투명성은 사라집니다. 그 후 빌라의 여기저기에 구멍들이 서서히 생깁니다.
빌라가 말합니다.
« 나는 모든 것을 쏟아내려 합니다. 유령-건축가여. 이제 나는 항문들을 갖습니다. »
그 많은 항문에서 점액이 쏟아집니다.
« 백 년 만에 느끼는 카타르시스 »
점액은 빌라의 위, 아래, 옆으로 다 새어 나갑니다. 빌라의 안쪽면도 바깥면들도 모두 불결 해집니다. 가로로 긴 창도 백색의 벽들, 빌라의 모든 곳들은 이제 불투명합니다.
15.
고약한 악취에 유령-건축가가 정신을 차립니다. 그때 유령-건축가는 이미지에서 그 머리를 빼냅니다. 유령-건축가는 세 걸음 정도 뒷걸음질해서 그 이미지를 마주합니다. 이미지는 더 이상 빛나지 않습니다. 이미지 안에 « 우리는 이미지 안 무언가의 위에 있다 »라는 텍스트도 더 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빌라의 윤곽은 잔상처럼 거기에 있습니다. « 지독한 악몽, 나는 어디를 갔다 왔는가? » 유령-건축가는 말합니다. 유령-건축가는 벽들에 새겨진 그림들에게 묻습니다. «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것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 그림들이 대답합니다. « 그 이미지는 건축의 페이스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도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
유령-건축가는 어두운 이미지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 건축의 페이스여! 사물의 등에 너의 구원을 위한 장소는 없는가? » 유령-건축가는 이미지를 뒤로 한 채 한참을 서 먼 곳을 바라봅니다. 망망한 끝이 없는 바다에는 심원하고 무한한 어두움만이 있습니다. 유령-건축가는 탑 아래를 바라봅니다. 섬이 움직입니다. 유령-건축가는 소리 지릅니다. « 우리는 지금 여기 무언가와 마주하고 있다! » 유령-건축가는 몸을 웅크린 후 다시 몸을 힘껏 피며 탑의 밖으로 비상합니다. 유령 건축가는 무한하고 심원한 어둠으로 자신을 내던집니다.
이론을 위한 다소 긴 각주
1. 사물의 등
사물의 등이라 불리는 섬. 그 섬은 신바드 이야기에서 비롯됩니다. 신바드의 배는 난파당합니다. 그의 배는 우연히 어느 작은 섬에 도착합니다. 그 섬은 마치 파라다이스 같습니다. 날씨는 좋고 사냥감은 풍부합니다. 신바드와 일행은 사냥하고 그것들을 구우려고 불을 피웁니다. 그런데 갑자기 섬이 움직입니다. 사실 그 섬은 큰 물고기이었습니다. 그들은 물고기는 등 위에 있습니다. 그 물고기의 등이 오랫동안 물 위에 드러낸 채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흙이 쌓인 것이었습니다. 물고기의 등은 마치 섬처럼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우리가 사물들을 기술적 도구로 대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이 설화를 인용합니다. 우리는 « 사물들의 앞면 혹은 윗면만, 사물들의 기술적 친절함과 우호적 통합만 익히 압니다 » (Han, 2022). 우리가 사물과 관계 맺을 때 우리는 자주 사물의 한 면과만 관계 맺습니다. 이렇게는 우리는 사물을 한 대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사물과의 진정한 만남은 마주 대함으로 가능합니다. 이렇게 나와 마주한 사물을 대상 objet이라 부릅니다. 이 마주 봄 덕분에 대상은 « 너 »가 될 수 있습니다. 이로서 너인 사물은 맞선 몸, Gegenkörper, 즉 « 상대 » 가 됩니다. 또 이 ‘나와 너’, 즉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상호성 Gegenseitigkeit 위에서 가능하게 됩니다 (Han, 2022). 오늘날 우리는 사물뿐 아니라 사람마저도 마주 보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사물뿐 아니라 사람마저도 도구로 대합니다. 상호성이 사라진 관계 속에서 타자는 부재합니다. 맞몸을 가진 타자 역시 현존하지 않습니다.
유령-건축가가 만난 것은 바로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타자입니다. 유령-건축가는 아직 이 타자와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유령-건축가는 아직 타자와의 마주함을 통해 타자의 본모습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주 할 수 없는 타자와의 만남은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타자로서의 사람이나 사물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만남은 우연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표류 중 우연히 발견하는 불빛, 즉 나를 부르는 불빛에 의해 가능합니다, 그것은 어떤 부름입니다. 유혹입니다. 이는 동일자로 하여금 타자를 향해 움직이게 합니다. 하는 유혹에 이끌려 유령-건축가가 다다른 섬이 바로 타자의 등입니다. 본모습을 숨기는 타자와의 조우를 위해서는 우리는 우화적 환상이 필요합니다.
2. 헤겔적 타워
헤겔에 따르면 건축은 예술의 기원은 건축입니다. 이 기원적 « 건축의 첫 시작을 탐구하면서, 우리는 먼저 인간의 주거인 오두막, 신과 그를 섬기는 신도들의 공동체를 맞아들일 내부를 지닌 신전을 발견합니다 » (Hegel, s.d. p. 35). 헤겔은 이 두 유형의 건축에서 건축의 근원적 존재이유인 « 거주하다 »를 발견합니다. 오두막은 인간을 위한 원시적 거주 수단이고 신전은 신을 위한 신성한 거주수단입니다 : « 오두막과 신전은 거주자로 인간과 성상을 전제하는데, 바로 그들을 위해 건축물들이 건립되었다 » (Hegel, s. d. p.36). 이 누구를 위한 건축은 « 거주하다 »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입니다. 헤겔은 이 수단인 건축을 비미학적 건축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거주라는 목적은 예술의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재적 목적은 거주자가 머무르는 집과 신전의 내부에서 실현됩니다. 이 내부, « 빈 공간, 즉 이 움푹한 곳으로 외재성이 스며드는데, 이 외재성으로 인해 그 건립물은 [미학적] 건축으로 접근하지 못합니다. » (Hollier, 1971). 그러므로 헤겔은 거주가능한 내부 공간을 가진 건물을 예술의 기원으로서 건축에서 제외합니다. 그는 죽어서 신이 된 자들의 거주지인 피라미드 역시 건축적 원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헤겔은 미학적 건축, 즉 예술의 기원으로서의 건축을 바벨탑에서 찾습니다. 바벨탑은 « 거주하다 » 를 위한 건조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내부에 빈 공간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 « 중앙에는 견고한 조적식 탑 (속이 비어 있지 않고 꽉 찬, 육중한 탑) 이 우뚝 서 있었노라고, 이 거대한 작품을 보았던 헤로도토스는 이야기한다. » (Hollier, 1971. p.47). 내부가 없는 바벨탑은 거주라는 즉 외재적 목적을 위한 건축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신전 안 유한한 공간에 신을 모십니다. 성화된 공간 l’espace sacré 아란 유한성에 무한을 기입하는 것 inscrire l’infini dans le fini (Jaquet, 2015. Chpitre IV.)을 가능케 합니다. 반면 유령-건축가가 다다른 곳에는 또 다른 바벨탑이 있습니다. 이 탑에는 성스러운 내부공간이 없습니다. 오직 오르기만 할 수 있습니다. 이 탑을 오르면 인간은 신에게 다다르고 또 신처럼 될 수 있습니다. 유령-건축가는 무한에 다다르기 위해 사물의 등 위에 새 바벨탑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3. 건축적 타자
일반적 건축 개념에 비추어 보면 거주 가능한 내부를 가진 건립물이 건축물입니다. 신전, 성당, 피라미드, 집 등 대부분의 건축물이 여기 포함됩니다. 헤겔에 따르면 이런 건축물은 미학적 건축에 접근 불가능 합니다. 이것들은 예술의 기원으로서의 건축이 아닙니다. 나는 이런 거주가능한 건축물을 건축적 건물이라 부르겠습니다. 거주라는 외재적 목적을 담을 수 있는 건물은 지금의 건축에 대한 관념을 바탕으로 보면 건축적 동일자입니다. 건물과 건축을 통합됩니다.
거주 불가능한 바벨탑은 지금의 건축에 대한 관념을 바탕으로 보면 건물이 아닙니다. 바벨탑은 일반적 건축개념의 밖에 있는 건축적 타자입니다. 그럼에도 헤겔의 미학적 건축 프로젝트에 비추어 보면 이 거주 불가능한 건립물이 기원적 건축입니다. 나는 이런 헤겔적 건조물을 ‘건축화된 건물’이라 부르겠습니다. 일반적 건축 개념에서 건축화된 건물은 조각과 비슷합니다. 그것을 건물이라 조차도 애매합니다. 이 속이 꽉 찬 건립물을 건물로 고려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헤겔적 건립물을 건축화해야 합니다. 이 건축화된 건물은 일반적 건축 개념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건축적 타자입니다. 건축과 건물을 분리되고 거리를 둡니다.
이것이 유령-건축가가 이 건축적 타자의 주위를 거리를 두고 돌며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롤랑 바르트는 시각은 가장 마술적인 감각 (Barthes, 1957. p.171).이라 합니다. 시각은 타자와 거리 두기를 가능케 합니다. 타자와 거리두기 덕분에 우리는 주는 낯 섬의 경이를 알 수 있습니다. 타자에의 접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타자에 침투하거나 타자가 나에게 침입하거나, 어떤 경우든 타자와의 접촉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이 침입적 접촉은 동일자의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평화로운 만남과 다릅니다.
4. 뮤즈들
건축적 타자인 탑에는 예술의 아홉 뮤즈들이 스며 있습니다. 예술의 신들은 건축화된 건물에 거주하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탑의 표면 또는 살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리스 어원에 따르면 건축은 archi-tecture, 원리 또는 근원 arkhi - 를 아는 짜 맞추는 이 tekton의 기예술 tekne입니다. 플라톤은 그의 책 공화국에서 mimetike tekne 즉 모방의 기예술인 회화, 조각 또 시를 이 건축술 arkhitektunice techne과 구별합니다. 건축은 고대부터 예술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습니다. 모방의 예술은 어떤 대상을 재현합니다. 반면 짜 맞추는 기예술은 재현하지 않습니다. 건축은 어떤 실현을 가능케 하는 원리 arche 위에서 작동합니다. 어떤 것을 실현하기 위한 원리들을 구성하는 (Wurman (ed.), 1986) 건축에 의해 지어진 것이 바로 건축화된 건물입니다.
첫째, 다섯째 그리고 일곱째 뮤즈는 유령-건축가에게 왜 재현적 건축을 하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둘째와 셋째 뮤즈는 유령-건축가가 왜 건축의 내부에 인간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여덟째 뮤즈는 왜 유령-건축가가 신성한 공간을 창조하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넷째와 여섯째 뮤즈는 유령-건축가가 왜 건축적 사명을 따르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마지막 뮤즈는 유령-건축가가 왜 운명의 명령을 거부하는지 질문합니다. 뮤즈들은 질문을 통해 유령-건축가가 탑의 꼭대기에 다다르기 전에 타자의 맞몸과 마주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건축적 타자의 맞선 몸이 요청하는 예술적 목소리들을 듣지 못합니다.
5. 터치스크린
터치스크린은 빛을 내면서 이미지와 문자들을 발산합니다. 그것은 문자를 빨리 읽고 대답하기 위해 스크린 자판을 터치하라고 우리를 닦달합니다. 또 그것은 이미지를 보고 흥미가 생기면 두 손가락을 벌려 확대해 보라고 우리를 닦달합니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은 닦달이라고 합니다. 예로 기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닦달해 자연을 자원으로 만들게 합니다. 자연은 항시적으로 주문가능한 상태의 부품으로 머무릅니다. 하이데거는 기술, 특히 근대적 기술은 인간을 역시 주문가능한 부품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근대적 기술은 ‘도발적 요청의 닦아세움’ l’interpellation pro-vaquante (Heidegger. p.23) 으로써 인간과 자연을 닦달합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텍스트는 유령-건축가의 눈으로 하여금 읽기를 닦달합니다. 그 텍스트는 « Wir sind über etwas im Bilde » (Heidegger, 1986)입니다. « 우리는 알고 있다. » « Nous savons quelque chose »라는 뜻의 이 텍스트는 문자 그대로는 « 우리는 이미지 안에서 무언가 위에 있다 ». « nous sommes, quant à quelque chose, dans l’image » 또는 « 무언가에 관해서 우리는 이미지 안에 있다 ». « nous sommes, quant à quelque chose, dans l’image »입니다.
터치스크린 안의 텍스트는 각자의 생각이나 감정 등 내면의 목소리를 글로 붙잡아 전송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의 텍스트-되기입니다. le devenir-texte du soi. 그리고 터치스크린 안에서 세계는 세워집니다. 즉 터치스크린은 세계는 이미지로 제작함으로써 세계를 붙잡습니다. » 이는 « 세계의-그림 되기 le devenir-image du monde » (Han, 2022. p.32)입니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유령-건축가로 하여금 스크린을 터치하게끔 합니다. 터치한다는 것은 « 거리 두기의 부재 » 를 의미합니다. 촉각은 « 모든 감각 가운데 탈신비화 작용이 가장 강한 감각 »입니다. 신비함을 사라지게 하는 터치스크린은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세계를 처분가능한 이미지로 바꿉니다. 또 그것은 시간을 두고 들어야 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즉시 전송가능한 문자로 바꿉니다. 터치스크린에서 거리를 두고 마주하는 타자 그리고 시간 속에서 이야기를 건네는 목소리로서의 타자는 현존 présence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세계는 하나의 Conception, Bild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유령건축가의 발에 상처를 주는 탑의 거침과 다르게 터치스크린의 매끄럽습니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습니다 le lisse ne blesse pas (Han, 2016). 매끄러움과 함께 우리는 아무 저항 없이 자아와 세계를 다룰 수 있습니다. 타자와의 만남에 따르는 « 재앙도, 상처도, 깨어짐이나 갈라짐도, 심지어 봉합선도 없습니다. » « le désastre n’a pas sa place, tout comme la blessure, la fracture, la fêlure, ou même la suture » (한병철, 2016, p.30). 매끄러움에는 타자의 부정성이 없습니다.
텍스트는 그렇게 유령-건축가의 정신에 자리 잡습니다. 또 유령-건축가 역시 타자의 부정성 없는 이미지 속으로 스며들어갑니다. 유령-건축가는 마치 스마트폰 얼굴인식 앱에 자기를 인식하듯, 자신의 페이스 une face를 이미지에 담급니다. 페이스는 얼굴과 다릅니다. 그것은 인간적 얼굴의 노출된 앞 면입니다 : « 레비나스에 따르면 얼굴은 타자의 초월성이 밀려들어 오는 탁월한 장소인바, 이때 초월성은 투명성의 반대 형상이다. 얼굴과 달리 페이스는 동일한 것의 내재성 속에 거주한다 » (한병철, 2017, p.30). 유령-건축가의 페이스는 섬의 등과 대척점에 있습니다. 유령-건축가의 투명한 얼굴이 동일자의 내재성을 재현한다면 섬의 등은 불투명한 타자의 부정성을 암시합니다. 타자의 등에서 벗어나 동일자의 터치스크린에 다다른 유령-건축가는 유혹에 빠집니다. 터치스크린으로 매끄럽게 스며들기 위해 유령-건축가는 눈을 감습니다. 유령-건축가는 타자와 만나는 몸을 유보하고 구상 la conception의 투명한 장으로 진입합니다.
6. 빛나는 마을과 건축적 산책
유령-건축가가 다다른 곳은 한 농업 마을입니다. 푸른 하늘 그리고 잔디로 덮인 땅이 쾌적한 마을의 경치를 만듭니다. 마을의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백색의 건물들은 깨끗합니다.
이 마을은 르 꼬르뷔지에의 « 빛나는 마을 »입니다. 빛나는 도시 근처 어디에 있는 이 빛나는 마을은 살기 위한 기계들이 배치된 농업을 위한 정 주지입니다. 르 꼬르뷔지에의 따르면 이 « 빛나는 농가. 빛나는 마을 » 프로젝트는 Nodert Bezard라는 농부의 편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르 꼬르뷔지에에게 도시에만 머무르지 말고 농촌계획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 « Le Corbusier, ne restez pas qu’en ville! Voulez-vous un peu vous occuper de nous, regarder nos campagnes, nos fermes, nos champs, nos villages … » (Le Corbusier, 1933, p.321).
이 마을은 시골마을이 아닙니다. 농업을 위한 작은 도시입니다 : « 농촌은 내일의 또 다른 도시입니다. » « La campagne est l’autre ville de demain » (Le Corbusier, 1964. p. 331). 잘 정비된 도로는 다른 마을들과 도시들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시골을 농업도시로 변화시키는 근대주의적 구원을 위한 수단입니다.
이 마을의 농가는 땅에 뿌리내린 목가적 집이 아닙니다. « 농가는 건축적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적 이벤트 비슷한 것, 땅의 인간화된 얼굴입니다. » « C’est quelque chose de semblable à un événement naturel, quelque chose qui est comme le visage humanisé de la terre » (Le Corbusier, 1964. p. 322). 그것은 근대 농업 노동자의 활동을 위한 거주기계입니다.
스쳐가는 회상을 뒤로한 채 유령-건축가는 하얀 집을 향해 걷습니다. (이 도회적 산책은 나중에 건물 안으로 이어져 건축적 산책이 됩니다.) 유령-건축가에게 한 흰색 건물이 자기를 « 조금씩 드러냅니다 » « se devoiler peu à peu ». 이 건물은 르꼬르뷔제에의 대표적인 근대적 주거 건물인 빌라 사부와입니다.
7. 검은 새
검은 새는 까마귀입니다. 이 새는 근대건축의 거장 르꼬르뷔지에가 보낸 메신저입니다. 르꼬르뷔지에의 꼬르뷔 Corbusier와 까마귀는 le corbeau 비슷하게 발음됩니다 (Chroniques d’architecture, 2019). 유령-건축가는 금방 그 위대한 건축가의 메시지를 알아챕니다. « 새로운 정신 » 은 르꼬르뷔지에가 발행했던 건축매거진 이름입니다. «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 는 그의 책 제목입니다. 수많은 건축 작품과 저술을 통해 그는 투명성과 순수성의 건축을 추구한 했습니다. 유리와 백색 벽의 건물들은 이런 근대 기능-합리주의 건축의 대표적 특성을 잘 표현합니다. 르꼬르뷔지에의 빌라 사부 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까마귀의 소리와 빠른 활강은 빌라 사부와라는 건물이 서서히 드러나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닦달 때문에 유령-건축가는 그 건물과 어떤 거리두지 못합니다. 까마귀가의 도발적 관심 끌기로 인해 그 건물의 파사드는 단번에 노출됩니다. 신정신의 메신저는 백색의 건물에 내려앉으며 유령-건축가에게 근대건축을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유령-건축가는 까마귀 빌라를 빛나는 신정신의 성스러운 공간이라 부릅니다. 이 공간에 거주하는 이는 바로 신정신입니다. 이 거주는 그 신정신을 모시는 근대 건축가들 덕분에 가능합니다.
8. 빛나는 빌라
르 꼬르뷔지에는 1927년에 새로운 건축의 다섯 가지 원칙 (Le Corbusier et Jeanneret, 1937. p. 128)을 제시합니다.
1. 필로티. 필로티들 위에 건물을 지음으로써 지상층은 교통 순환을 위한 공간이 됩니다. 또 필로티 위에 방들은 습기와 어두움에서 해방됩니다. 2. 옥상테라스. 전통적인 경사지붕 대신 평지붕을 도입해서 지붕 위에 테라스를 만듭니다. 테라스는 솔라리움, 운동장, 수영장 또는 옥상정원으로 쓸 수 있습니다. 3. 자유로운 평면. 하중은 철골 또는 철근 콘크리트 기둥-슬라브 구조가 전적으로 담당합니다. 이로써 하중을 받는 벽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로써 평면을 위한 구획은 구조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4. 가로로 긴 창. 기둥-슬라브 구조 덕분에 창을 위한 상인방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가로로 긴 창이 실현가능하게 됩니다. 5. 자유로운 파사드. 기둥들은 외벽 안쪽에 배치됩니다. 그리고 가벼운 벽은 구조에 독립적으로 슬라브 바깥쪽에 설치됩니다. 마치 파사드는 건물의 피부나 피복처럼 됩니다.
빛나는 도시에서 시작된 자동차 도로는 빛나는 마을을 거쳐 빛나는 빌라 아래에 다다릅니다. 자동차 드라이브 faire un tour en voiture로 시작한 도시적 산책은 이제 건물 안에서 건축적 산책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경사로를 오르며 지상층에서 주거층으로 올라갑니다. 주거층은 가로로 긴 창 덕분에 밝고 자유로운 평면 덕분에 개방적입니다. 땅에 고착되어 있는 전근대의 건축적 속박에서 벗어나 근대건축은 빛나는 자유로움을 유령-건축가에게 선사합니다.
9. 가로로 긴 창 – 세계의 이미지 되기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가로로 긴 창은 근대건축의 중요한 특성인 투명성과 밀접하게 관계합니다. 이 가로로 긴 창이 건축에 도입 가능하게 한 것은 건물의 벽이 하중을 담당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표피 또는 피복 같은 것이 된 벽에 긴 창을 자유롭게 설치할 수 있습니다. 또는 유리 커튼 월을 설치해 건물의 벽 자체를 투명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르꼬르뷔지에는 아마도 건물을 완전히 투명하게 만들고 싶었든 것 같습니다.. « 건물은 마치 비눗방울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부에서 숨을 잘 조절하면서 불면 그 비눗방울은 완벽하고 조화로울 것입니다. » « Un édifice est comme une bulle de savon. Cette bulle est parfaite et harmonieuse si le souffle est bien réparti, bien réglé de l’intérieur. » (Le Corbusier, 1923. p. 147)
이 비눗방울과 건축의 유비 analogie는 근대건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근대건축은 더 이상 두꺼운 벽에 제약받지 않습니다. 근대적 건물은 외피로 감싸져 있습니다. 이 외피는 내부와 외부를 경계 짓습니다. 예전에 무거운 벽이 하던 일을 이제 가벼운 외피인 건축적 피복 또는 건축적 막이 담당합니다. 이 막은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투명합니다. 빌라 사부와의 가로로 긴 창이 바로 이 투명한 부분입니다. 가로로 긴 창은 비눗방울의 투명한 막의 건축적 재현입니다.
투명한 외피 안에는 잘 조정된 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숨은 정신과 관련 있습니다. 르꼬르뷔지가 말한 잘 조정된 숨은 합리적 정신을 말합니다. 합리성은 근대성의 바탕입니다. 이 근대성의 건축적 실현은 신정신이 주도합니다. 이 신정신에 의해 근대인의 합리적 삶은 근대 건축에 거하게 됩니다. 잘 조정된 숨이 비눗방울 안에 가득 차 있듯 신정신은 새로운 건축 안에 거주합니다.
르꼬르뷔지에는 건축의 안과 밖이 교통 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건축의 내적 내용이 온전히 건물 외부에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즉 내부에 거주하는 신정신이 외부화되어 건축적으로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 외부는 내부의 결과입니다 » (Le Corbusier, 1923. p. 143) 이 근대적 정신의 삶의 건축적 실현은 투명한 막 덕분에 가능해집니다. 이 투명성은 유리와 순수한 백색 벽으로 건축적으로 실현됩니다. 그는 진정성으로 근대정신을 근대 건축의 외부에 투사하고자 합니다.
르꼬르뷔지에는 외적 세계가 또한 건물에 유입되기를 원합니다. 이 역시 투명한 막이 가능하게 합니다. 르꼬르뷔지에게 세계는 건축에게 위험한 또는 낯선 타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세계는 전적으로 도시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빛나는 도시와 빛나는 도시화된 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건축에로의 유입에는 어떤 타자성의 저항도 없습니다. 동일자로서의 세계는 매끄럽게 건축으로 유입됩니다.
그럼에도 실재 세계, 특별히 자연은 도회적 투시도에서 볼 수 있는 목가적 환경을 건축에게 항상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자연의 불친절한 거침은 투명한 백색 건물 안에서 외부를 향유하고자 하는 근대인의 신정신에게는 하나의 위협입니다. 근대건축가들은 이 위협을 극복하고자 세계를 건축에 경관으로서 유입합니다. 우리는 르꼬르뷔지에의 스케치들에서 이 경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도시-세계와 건물의 경관 안에서의 통합을 목격합니다. 이 통합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가로로 긴 창입니다. 가로로 긴 창은 외부를 경관으로서 내부에 유입합니다. 경관은 세계-도시를 이미지로 내부에 제공합니다. 세계-도시의 자연은 건축적 근대성 도발적 요청에 따라 경관으로 « 그곳에 그렇게 » 있어지기 (하이데거, 1958, p. 23)가 요청됩니다. 투명한 가로로 긴 창은 세계의 경관 되기를 수행합니다.
가로로 긴 투명한 창은 세계를 경관으로 만들어 건축에 제공하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백 년 전에 등장한 세계의 경관 되기 장치와 오늘날 스마트폰에서 유사점을 봅니다. 스마트폰은 세계의 이미지 되기를 수행합니다. 스마트폰의 정보는 이미지로 전달됩니다. 세계는 이미지로 대상화됩니다. 스마트폰은 세계를 이미지로 제작함으로써 herstellen 세계를 붙잡습니다 habhaft werden. (Han, 2022). 기술적 장치로서 스마트폰은 세계를 주문 가능한 부품으로 만들고 이미지를 내놓으라고 닦달합니다. 가로로 긴 창 역시 이런 장치입니다. 이 건축적 장치는 세계를 경관으로 대상화합니다. 이 창은 자연을 경관으로 제작함으로써 세계를 담습니다. 세계의 경관 되기로 인해 우리는 몸으로 세계를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세계는 이미지로 근대건축 안의 거주자, 즉 신정신의 안구에 직접 닿습니다. 근대 건축은 세계를 동일자의 주문 가능한 경관적 바탕으로 만들고 자연의 이미지를 내놓으라고 닦달합니다.
유령-건축가가 가로로 긴 창의 유리를 터치하자 창이 스크린이 됩니다. 안구에 투영된 매끄러운 이미지를 유령-건축가가 손 끝의 촉각으로 느낄 때 경관을 위한 투명한 유리는 이미지를 위한 투명한 막으로 마술적으로 변합니다. 우리가 침대에서 소파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며 시간을 보내듯 유령-건축가 역시 안락한 실내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보고 만지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내 피곤해진 유령-건축가는 르 꼬르뷔지에의 동료인 Chalotte Perriand 가 디자인 한 연속된 조절이 가능한 긴 의자 Chaise longue à réglage continu에 몸을 누입니다.
10. 타자의 목소리
자연은 더 이상 경관, 즉 세계-이미지의 하나 아닙니다. 자연은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연은 더 이상 고분고분한 경관이 아닙니다. 세계 역시 더 이상 다룰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닙니다. 세계는 투시도 속의 빛나는 도시가 아닙니다. 자연의 무자비함 앞에서 합리성은 날갯짓하며 사라집니다. 이제 유령-건축가는 온몸으로 자연인 세계를 마주 해야 합니다.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명령하는 목소리는 타자의 목소리입니다. 스마트폰이 이미지와 문자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소통하게 한다면 타자의 목소리는 명령합니다. 발터 벤야민은 어린 시절 그의 집에서 울리던 전화기의 벨소리를 타자의 목소리로 간주합니다 : « 울리는 요란한 전화벨은 베를린 주택의 섬뜩함을 심화할 따름이었습니다. […] 그 요란한 소리를 멈추려고 그 사이로 머리를 들이 밀면, 나는 저쪽에서 말하는 목소리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었습니다. 나를 침범하는 그 목소리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었습니다. » (Benjamin, 2014) 그 침범하는 소리처럼 타자의 목소리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 밖으로 나와 나와 대면하시오 ». 이 음성적 타자성은 우리를 밖으로 끌어내며 우리가 온몸으로 세계에서 존재하기를 명령합니다.
11. 건축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빌라 사부와의 네 페이스들입니다. 진짜 자연의 등장으로 합리성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 균열 사이로 페이스들은 목소리를 냅니다. 목소리들은 건축과 건축가에 대해 언급합니다. 첫째 얼굴은 그리스어 어원에 근거해 건축은 archi-tecture, 원리 또는 근원 arkhi - 를 아는 짜 맞추는 이 tekton의 기예술 tekne이라 정의합니다. 둘째 얼굴은 건축의 내부, 즉 움푹한 곳에 대해 말합니다. 그 얼굴은 건축이 어떤 외부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그 목적의 외재성은 건축의 내부에 스며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Hegel, s. d., p.35). 근대건축에게 이 움푹한 곳은 건축공간입니다. 셋째 얼굴은 말합니다. 건축은 사회질서의 이미지입니다. 건축은 사회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 « 건축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덫으로 사회를 포획합니다. […] 건축은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다 사회를 고착시킵니다. » (Hollier, 1971, 건축이라는 항목). 건축은 그 사회를 포획해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대표합니다. 그리고 그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는 « 미완성을 감추는 어떤 형상을 제공하는 » (Hollier, 1971, 건축이라는 항목) 장치입니다. 장치로서의 근대건축은 근대적 합리성을 재현합니다. 합리주의 건축은 자연을 기능적 도시의 형식으로 또 세계를 기능적 공간의 형식으로 포획됩니다.
넷째 얼굴이 유령-건축가를 유령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고스트 라이터가 자신의 글을 남의 생각인 것처럼 생산하듯, 유령-건축가 역시 자신의 건축을 사회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자신의 유령이 아니라 건축가라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유령-건축가는 사회 이데올로기의 첨병인 것이 때론 자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유령-건축가는 건축이 사회를 포획하는 장치하는 것을 아직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건축을 구원할 자는 유령-건축가뿐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근대건축이라는 봉토의 훈작기사 commendatore 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드니 홀리에 따르면 바타유는 « 건축을 감옥의 간수라 칭하면서 권위적 위계와의 공모를 비난합니다. 말하자면 사회의 초자아를 표상하는 심급 » (Hollier, 1989)이라 정의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근대건축 같은 그런 심급이 아닙니다. 유령-건축가는 방문자입니다. 건축의 타자로서의 유령-건축가는 그래서 이 빌라, 어쩌면 이 건축을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12. 건축적 외피
건축이 감옥의 간수라면 건축의 외면인 파사드는 그 간수의 유니폼과 같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외양으로서 파사드는 사회의 권위적 위계를 재현했습니다. 우리는 대성당의 외양에서 신정의 권위를 궁전의 외양에서 왕정의 권위를 봅니다. 우리는 그 건물들을 보는 즉시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세워진 건물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유니폼은 그 옷을 입은 자가 군인인지 성직자인지 소방수인지를 알려줍니다. 유니폼으로서의 건축적 파사드는 자신이 누군인지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 메시지는 시각적입니다. 시각적 메시지는 건축적 구성 그리고 예술적 장식 등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넵니다. 유니폼 파사드는 시각적 수사를 통해 사회적 권위를 세계에 재현합니다.
근대건축의 파사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근대건축은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근대건축의 외양이 드러내는 것은 근대적 합리성의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르꼬르뷔지에에 따르면 이 합리성은 잘 조정된 숨, 즉 합리적 정신입니다. 이 신정신은 투명합니다. 투명성을 재현하는 근대건축에 시각적 수사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이 정신은 잘 조정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정신을 둘러싼 투명한 외피가 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외피를 잘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 정신의 건축적 기능주의의 면모입니다. 합리적 정신은 건물의 내부인 빈 곳을 기능적으로 운영합니다. 그렇게 근대적 신정신은 공간에 합리적으로 거주합니다 : « 건축의 외양은 정신의 순수한 창작입니다. » « La modénature [de l’architecture] est une pure céation de l’esprit » (Le Corbusier, 1923. p.163)
정신은 몸을 갖지 않습니다. 근대적 정신은 몸을 부인합니다. 몸에서 스며 나오는 욕망이 없는 정신은 합리적입니다. 그것은 순수합니다. 건축에서 이 순수한 신정신은 투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유령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고 소리 없는 유령은 여기 지금 자기가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알릴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투명한 또 소리 없는 존재를 작용 없이 인지한다면 그것은 환각과 환청을 통해서일 뿐입니다.
근대적 합리성의 권위는 투명성이라는 건축적 외피 덕분에 건축에서 보이지 않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유니폼을 입고 우리 앞에 서 있는 간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이지 않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지금 여기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이 유령간수는 우리로 하여금 늘 감시당한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투명한 외피를 입은 정신은 베일을 싸고 우리 주위를 배회하는 유령 같습니다.
여기 빌라의 페이스들은 근대건축의 베일입니다. 이 베일은 세계에 건축이 투명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유령의 베일로서의 근대건축의 외양은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하지 않고 메시지만을 보냅니다. 외양은 건축 안의 내용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그 외양으로써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 즉 합리적 정신은 어떤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물화 하는 역량이 없습니다. 근대건축은 여기 건물이 있다는 것은 알려주지만 그 건물이 무슨 용도인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여기 필로티 위에 백색의 건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건물이 도시주택인지 농가인지 도심의 갤러리인지 명백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눈에 빌라 사부 와가 주택인지 사무실건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근대건축의 외양은 우리에게 시각적 메시지는 주지만 목소리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근대건축은 비사물적입니다.
13. 건축적 변비
신정신은 근대건축 안에 거주합니다. 이곳을 우리는 건축적 공간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건축적 공간은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Un espace architectural n’est pas, en effet, toujours, immédiatement lisible. (Godin et Mühlethaler, 2005, p. 17) 건축에 있어 전문술어로서의 « 공간» 의 철학적 용법은 신격화된 근대주의 공간에 기반합니다. 근대주의 공간은 뉴톤의 공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근대 물리학 공간이 합리주의 철학에 수용되면서 절대화되었는데 이 과정을 현대 공간 사회학에서는 신격화라고 봅니다 (마르쿠스 슈뢰르. 공간, 장소, 경계. p 41). 사물들의 위치관계에서 파악되는 상대적 공간관과 대립하는 뉴톤의 절대공간은 개념적으로 수용기 Behälter auffassung입니다. 왜냐하면 뉴톤공간은 사물들을 수용해 사물들이 독립적인 위치를 정위하고 운동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수용기로서의 공간은 근대건축에 비판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비판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건축공간은 뉴톤공간처럼 사물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축공간은 사물에 의해 둘러 쌓여지면서 정의됩니다. 이 구획된 공간은 사물이 아닌 비물질적인 것을 수용합니다. 그것은 안에 비사물을 놓습니다.
건축은 무언가를 수용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기술 또는 예술입니다. 19 세기에 셀링은 예술철학 강의에서 « 건축은 공간의 예술 Raumkust »이라 했고 슈마르죠는 건축이 공간의 디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티나 뢰브. 공간적 선회, 그 후 20년 : 관계형식으로서의 공간. 공간에 대한 사회인문학적 이해. p. 99) 근대 건축 공간이 무엇을 수용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들이 있습니다만 20세기 초반 합리주의 건축이 수용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 기능 » 입니다. 기능은 좁게는 인간의 행동 넓게는 인간 경험의 환원주의적 개념입니다. 근대 건축가들은 행동과 행위에 기반한 기능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생산하려 했습니다
다시 한번 르꼬르뷔지에의 말을 살펴봅시다. « 건물은 마치 비눗방울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부에서 숨을 잘 조절하면서 불면 그 비눗방울은 완벽하고 조화로울 것입니다. » « Un édifice est comme une bulle de savon. Cette bulle est parfaite et harmonieuse si le souffle est bien réparti, bien réglé de l’intérieur » (Le Corbusier, 1995. p. 147). 수용기로서의 건축에서 비눗방울은 외피입니다. 그 안에는 신정신이 있습니다. 이성은 근대적 합리성의 모습으로 건축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내부에서 잘 조절된 숨이란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기능주의적 면모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비눗방울 유비에서 건축공간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건축공간은 외피에 의해 둘러 싸인 다고 봅니다. 하지만 비누방율의 비유를 보면 둘러 쌓인 것은 신정신으로 대표되는 기능, 근대적 생활, 합리주의 이데올로기 등이지 공간이 아닙니다. 이 신정신을 외부로 투사하는 것은 바로 외피입니다. 즉 신정신을 수용해 그 즉시 외부로 투사하는 것은 바로 외피입니다. 즉각적 투사는 외피의 투명성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이 투명성의 즉각적 투사 때문에 우리는 외피가 신정신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만약 비물질적인 기능등의 신정신을 수용하는 것이 구획된 공간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신정신을 수용하는 투명한 외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외피의 안쪽 면을 건축공간의 등가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공간은 투명한 외피가 된 것입니다.
근대건축의 외피는 내부를 정직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건축설계에서 건물의 내부는 평면으로 구성됩니다. « 평면은 발전기이었습니다. 평면 없이는 무질서만이 있었습니다 » (르꼬르뷔지에.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 Le plan est le générateur. Sans plan, il y a désordre, arbitraire » (Le Corbusier, 1923/1995p.XVIII). 평면은 3차원적으로 번역되면 볼륨이 되고 볼륨은 공간적 외피인 면들로 감싸입니다. 근대건축의 명령에 따라 외피로 구성된 입면은 평면을 정직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근대건축은 내부를 드러내는 투명한 입면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외피는 정직한 파사드를 완성하기에는 충분히 기능적이지 못했습니다. « 서구 건축에서는, 건물의 외부는 내부가 확증하는 것을 그 내부에 대해 폭로한다는 점에서 이 둘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간적인 가정이 있어 왔습니다. 정직한 파사드는 그것이 품고 있는 활동에 대해 얘기를 해줍니다. 그러나 수학적으로. 3차원적 대상물의 내부 볼륨은 세제곱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것을 에워싸는 외피는 단지 제곱으로 증가할 뿐입니다 : 점점 작은 표면으로 더욱 많은 내부 활동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 (렘쿨하스. 정신착란증의 뉴욕. p. 85). (Koolhaas, 2002, p.100) 이로 인해 정직하게 평면을 드러내야 하는 투명한 입면은 과잉적 양상으로 볼륨인 내부를 드러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빌라 사부와의 페이스들은 이 과잉적 투사로 인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들은 건축 안에 꽉 찬 신정신의 비물질성, 발생적 평면을 제어하는 합리의 기능성, 투명한 외피의 정직한 노출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투사에도 불구하고 근대건축은 이 건물이 어떤 건물인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근대건축은 단지 « 이것은 (건축적) 건물이다 »라는 시각적 메시지만 줄 뿐입니다. 우리는 시선으로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메시지를 보내지만 이야기하지 않는 근대건축은 자신 안에 내적 내용들의 더미를 만듭니다. 근대건축은 건축적 변비를 진단받습니다.
14. 이질학
유령-건축가는 페이스들, 건축적 외피들의 고통을 에 공감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그 투명성을 제거하기 위해 음산한 놀이 le jeu lugubre를 제안합니다. 음산한 놀이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한 구석에는 속옷 바지를 입은 사람의 뒷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내의 양다리를 따라 똥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Hollier, s. d. 분변학). 유령-건축가는 건축적 변비를 이질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것은 죠르쥬 바타이유식의 분변학적 해결책입니다. 드니 홀리에에 따르면 이는 « 이성을 똥 먹이는 행위입니다. […] 이는 이성에 곧바로 타격을 주는 방법입니다 » (Hollier, s. d. 분변학). 이 방법은 이성의 체계에 이질적인 것들 또 이단적인 것들을 도입함으써 합리적 체계를 뒤 흔드는 전략입니다. 유령-건축가의 분변학적 방법은 건축이라는 술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비정형의 것들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순수한 대신에 불결한, 빛나는 대신에 어두운, 투명한 대신에 장애물인, 위대한 대신에 가치 없는 그리고 구축적 정형 대신 유동적 비정형을 제시합니다. 이런 것들은 « 별것 아니고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우스꽝스러운 » 형체 없는 aeidès 것들입니다 (Hollier, s. d. 분변학).
유령-건축가가 빌라 사부와에 입히는 타격은 바타유가 과학과 철학에 입히는 타격과 다르지 않습니다. 근대건축은 « 비정형을 두려워하며, 이데아-형상의 고유한 영역으로 도피하기 위해 이 반발을 극복(지양)합니다 ». 근대건축은 « 자신의 임무 (폐기물에 맞서고 그것을 수거하고 그것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를 수행하기 위해 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의 청소부, 그를 똥 먹여야 한다. 이성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열한 행위를 통해. » (Hollier, s. d. 분변학). 우리는 빛나는 건축과 빛나는 마을 그리고 빛나는 도시가 만드는 외부 없는 동질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근대건축은 그 자신 안에 비건축적 내용들의 더미를 쌓아 놓고 있습니다. 근대건축은 이 건축적 변비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근대건축의 투명한 외피는 이 문제에 무능합니다. 더 큰 문제는 건축의 밖에 외부가 없기 때문에 안에서 밖으로의 배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배설을 위해 유령-건축가는 근대건축에 어떤 비정형의 똥을 던져서 건축의 비건축적 내용을 타파해야 합니다. 유령-건축가는 근대건축의 배설구를 만들어 건축이 근대건축의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틈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건축적 건물을 건축화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대건축이 상상할 수 없는 건축 아닌 그 무엇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15. 건축적 육화
신정신의 발현인 빛나는 빌라의 투명한 외피는 이제 불결해졌습니다. 이 분변학적 타격으로 인해 투명성을 잃은 빌라는 이제 몸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빌라가 얻은 것은 불투명성뿐입니다. 투명한 외피 대신 사물적 외투를 걸친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건축의 몸을 가진 다는 것, 건축의 육화는 이 정도 타격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겨우 투명성이 제거되었을 뿐입니다. 유령-건축가는 앞으로 외피를 제거하고 공간을 제거하고 빈 곳을 메꿔야 합니다. 유령-건축가는 마지막에 결국 건축을 부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유령-건축가는 그 페이스를 스크린에서 빼며 « 우리는 이미지 안에서 무언가의 위에 있다 »라는 상황에서 벗어납니다. 이미지는 더 이상 빛나지 않습니다. 유령-건축가가 그것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자 그것은 사물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건축의 사물화, 그 시도를 유령-건축가는 구원이라 칭합니다. 구원을 완수했다고 생각하는 유령-건축가 만난 것은 안정된 평안이 아닙니다. 무한한 어둠에서 부유하는 섬이 주는 불안 위에 유령-건축가는 여전히 서 있습니다.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그 불안한 불길을 긍정합니다. 그 긍정은 유령-건축가가 탑 위에서 무언가와 마주하고 있다는 현존 Presence에서 비롯됩니다.
유령-건축가는 탑에서 비상하며 자신을 무한에 던집니다. 유령-건축가는 동시에 심연을 향해 뛰어내립니다. 유령-건축가는 스스로의 의지로 세계에 자기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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