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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적 변비

르 꼬르뷔지에의 빌라 사부와에 관해

건축적 변비


신정신은 근대건축 안에 거주합니다. 이곳을 우리는 건축적 공간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 이 건축적 공간은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Un espace architectural n’est pas, en effet, toujours, immédiatement lisible»  (Godin et Mühlethaler, 2005, p. 17). 건축에 있어 전문술어로서의 « 공간» 의 철학적 용법은 신격화된 근대주의 공간에 기반합니다. 근대주의 공간은 뉴톤의 공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근대 물리학 공간이 합리주의 철학에 수용되면서 절대화되었는데 이 과정을 현대 공간 사회학에서는 신격화라고 봅니다 (마르쿠스 슈뢰르. 공간, 장소, 경계. p 41).  사물들의 위치관계에서 파악되는 상대적 공간관과 대립하는 뉴톤의 절대공간은 개념적으로 수용기 Behälter auffassung입니다. 왜냐하면 뉴톤공간은 사물들을 수용해 사물들이 독립적인 위치를 정위하고 운동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수용기로서의 공간은 근대건축에 비판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비판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건축공간은 뉴톤공간처럼 사물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축공간은 사물에 의해 둘러 쌓이면서 정의됩니다. 이 구획된 공간은 사물이 아닌 비물질적인 것을 수용합니다. 그것은 안에 비사물을 놓습니다. 건축은 무언가를 수용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기술 또는 예술입니다. 19 세기에 셀링은 예술철학 강의에서 « 건축은 공간의 예술 Raumkust »이라 했고 슈마르죠는 건축이 공간의 디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티나 뢰브. 공간적 선회, 그 후 20년 : 관계형식으로서의 공간. 공간에 대한 사회인문학적 이해. p. 99) 근대 건축 공간이 무엇을 수용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들이 있습니다만 20세기 초반 합리주의 건축이 수용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 기능 » 입니다. 기능은 좁게는 인간의 행동 넓게는 인간 경험의 환원주의적 개념입니다. 근대 건축가들은 행동과 행위에 기반한 기능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생산하려 했습니다.


르꼬르뷔지에의 말을 살펴봅시다. « 건물은 마치 비눗방울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부에서 숨을 잘 조절하면서 불면 그 비눗방울은 완벽하고 조화로울 것입니다.  Un édifice est comme une bulle de savon. Cette bulle est parfaite et harmonieuse si le souffle est bien réparti, bien  réglé de l’intérieur » (Le Corbusier, 1923/1995. p. 147). 수용기로서의 건축에서 비눗방울은 외피입니다. 그 안에는 신정신이 있습니다. 이성은 근대적 합리성의 모습으로 건축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내부에서 잘 조절된 숨이란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기능주의적 면모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비눗방울 유비에서 건축공간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건축공간은 외피에 의해 둘러 싸인 다고 봅니다. 하지만 비누방율의 비유를 보면 둘러 쌓인 것은 신정신으로 대표되는 기능,  근대적 생활, 합리주의 이데올로기 등이지 공간이 아닙니다. 이 신정신을 외부로 투사하는 것은 바로 외피입니다. 즉 신정신을 수용해 그 즉시 외부로 투사하는 것은 바로 외피입니다. 즉각적 투사는 외피의 투명성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이 투명성의 즉각적 투사 때문에 우리는 외피가 신정신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만약 비물질적인 기능등의 신정신을 수용하는 것이 구획된 공간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신정신을 수용하는 투명한 외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외피의 안쪽 면을 건축공간의 등가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공간은 투명한 외피가 된 것입니다.


근대건축의 외피는 내부를 정직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건축설계에서 건물의 내부는 평면으로 구성됩니다. « 평면은 발전기이었습니다. 평면 없이는 무질서만이 있었습니다. Le plan est le générateur. Sans plan, il y a désordre, arbitraire » (Le Corbusier, 1923/1995 p.XVIII). 평면은 3차원적으로 번역되면 볼륨이 되고 볼륨은 공간적 외피인 면들로 감싸입니다. 근대건축의 명령에 따라 외피로 구성된 입면은 평면을 정직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근대건축은 내부를 드러내는 투명한 입면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외피는 정직한 파사드를 완성하기에는 충분히 기능적이지 못했습니다. « 서구 건축에서는, 건물의 외부는 내부가 확증하는 것을 그 내부에 대해 폭로한다는 점에서 이 둘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간적인 가정이 있어 왔습니다. 정직한 파사드는 그것이 품고 있는 활동에 대해 얘기를 해줍니다. 그러나 수학적으로. 3차원적 대상물의 내부 볼륨은 세제곱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것을 에워싸는 외피는 단지 제곱으로 증가할 뿐입니다 : 점점 작은 표면으로 더욱 많은 내부 활동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 (렘쿨하스. 정신착란증의 뉴욕. p. 85). (Koolhaas, 2002, p.100) 이로 인해 정직하게 평면을 드러내야 하는 투명한 입면은 과잉적 양상으로 볼륨인 내부를 드러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빌라 사부와의 페이스들은 이 과잉적 투사로 인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들은 건축 안에 꽉 찬 신정신의 비물질성, 발생적 평면을 제어하는 합리의 기능성, 투명한 외피의 정직한 노출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투사에도 불구하고  근대건축은 이 건물이 어떤 건물인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근대건축은 단지 « 이것은 (건축적) 건물이다 »라는 시각적 메시지만 줄 뿐입니다. 우리는 시선으로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메시지를 보내지만 이야기하지 않는 근대건축은 자신 안에 내적 내용들의 더미를 만듭니다. 근대건축은 건축적 변비를 진단받습니다.


Godin, C et Mühlethaler, L. (2005). Édifier. L’architecture et le lieu.

Koolhaas, R. (2002). New York délir. Parenthèses. 

Le Corbusier. (1923). Vers une architecture (1995e éd.). Flammarion. 

Löw, M. Twenty years after the Spatial Turn : Space as a form of relationship. University of Seou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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