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orvorism - 애완 愛玩 아닌 애식 愛食
Amorvorism - 애완 愛玩 아닌 애식 愛食
에바 일루즈는 책 ‘사랑은 왜 아픈가’에서 오늘날 사랑의 정열이 식어버린 이유를 ‘사랑의 합리화’에서 찾습니다. 합리화라는 술어는 근대의 산물입니다. 근대는 인간에게 합리적 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근대인은 스스로 합리적이 되고 또 그 자신의 외적 환경뿐 아니라 내적 심리 또한 합리화했습니다. 합리화는 과학의 과정입니다. 한 진리에 하나의 인식을 일치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 따라 근대인은 몸과 마음의 작용인 사랑을 정신 작용으로서의 사랑으로 환원했습니다. 정신의 작용으로 인식 가능하게 된 사랑은 이제 어떤 진리와 합치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을 중세인들도 했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아닌 신과 어떤 사랑을 합치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갖고,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받고, 사랑에 빠집니다. 이런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사랑을 온전히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온전한 사랑을 주고받고 또는 사랑에 빠지고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유순하게 길들여진 애완 愛玩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 밖에 버려진 마음의 사랑과 몸의 사랑을 잠시 (대략 만년정도) 잊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열된 정신들 사이에서 늘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배회하는 사랑들은 중심에서 쫓겨난 영장류 원숭이들처럼 진화하고 있습니다. 파스칼 키냐르는 그의 책 ‘사변적 서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주변부에서 포식당할 위험에 놓은 수컷들은 그들의 위협하는 먹잇감에게 다가갔고, 그 먹잇감과 한편이 되었다. 한 먹잇감이 한 먹잇감을 탐내고, 그 먹잇감을 두고 다른 먹잇감들과 싸운다. 이것이 인류의 근원이다. 모방 포식 말이다. » 이 영감 가득한 사변으로부터 우리는 그 예전의 동굴을 환상할 수 있습니다. 쫓겨난 원숭이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포식자가 되었듯이 또 동시에 스스로 포식자에 의해 언제든 잡아 먹힐 수 있는 먹잇감이 되었듯이 몸과 마음의 사랑들은 서로에게 먹잇감이 되고 포식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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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고 며칠을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처럼 몸과 마음의 사랑은 다른 몸과 마음의 사랑을 노려봅니다. 포식자는 먹잇감을 몰고 치고 물고 상처 냅니다. 숨이 붙어 있는 먹잇감의 살을 이빨로 뜯어 그 속으로 혀를 깊숙이 집어넣습니다. 먹잇감은 자신의 눈으로 포식자의 이빨이 자기 배를 가르는 것을 봅니다. 내장 깊숙이 포식자의 뜨거운 주둥이가 들어옵니다. 진정한 타자의 살덩어리가 내 몸 깊숙이 쑤욱 들어옵니다.
몸과 마음의 사랑은 먹잇감과 포식자 사이처럼 온전한 타자 사이의 사랑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먹고 먹힙니다. 사랑은 애식동물 amorvore animal 입니다. 먹잇감과 포식자 사이에는 어떤 장소가 없습니다. 모든 곳이 사냥터입니다. 모든 곳이 죽음의 터이고 모든 곳이 삶의 터입니다. 이 몸과 마음의 사랑은 아포토스 atopos 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래서 바타이유는 이 사랑을 "작은 죽음"이라 일컫습니다. 나, 키메타아스 Kimetarx는 이를 "신적 오르가슴" 이라 부릅니다.
주변으로 쫓겨나지 못한 원숭이들은 진화하지 못하고 계속 원숭이로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숭이들을 상상합니다. 작은 과일들과 곡식들을 채집하듯 사랑을 모으고 주고받는 아카디아의 원숭이들과 이성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유토피아의 원숭이들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애식동물인 우리는 그 추방의 날의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숭이들은 몸과 마음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애식동물입니다. We are amorv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