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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Feb 24. 2024

특별하지 않은 날의 특별함

빛을 쬐여주기

어제는 컨디션이 안 좋아서 12시 즈음 잠에 들었다.

근 한 달간 매일같이 꿈을 꾸고 잠을 설쳤는데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났고, 개운한 듯 멍한 느낌으로 점심을 맞이했다.

뾰족한 알람소리로 억지로 아침을 깼던 평일과는 다른 날.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밝아짐으로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주말이 왔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토요일이라 게으름을 피워본다.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붓기로 다리가 묵직해진 것 같아 벽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를 올린다. 피가 돌고 혈액순환이 되면서 종아리가 시원해진다.

고개를 뒤로 젖혀 밝아진 창을 바라보았다. 암막커튼 옆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오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은빛 오븐의 머리가 하얗게 반짝인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거꾸로 뒤집힌 방을 바라보면서 남아있는 잠의 여운을 즐겼다.


꽤나 오래 게으른 시간을 보내고 일어났다.

간밤에 따라놓아 미지근해진 보리차를 들이켰다. 차가웠던 보리차는 꿀꺽꿀꺽 삼키기 좋게 미지근한 온도가 되어있었다.


물을 마시고 건조기 안의 옷가지들을 꺼내어 갰다.

멍 때리면서 티셔츠와 양말을 접고, 보송하고 도톰해진 수건을 돌돌돌 말았다. 접은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하고 부스스한 나를 접는 것 같다. 옷가지들을 접으며 마음도 덩달아 가지런 해졌다.


머리를 자르고 가장 좋은 점은, 씻은 후 드라이기를 안 해도 된다는 거다. 시간만 여유롭다면!

수건으로 탈탈 털어 큰 물기만 제거하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머리가 자연스럽게 말라있다. 물론 드라이기로 말리는 것만큼 깔끔하게 정돈되지는 않는다.

젖어서 두피에 적당히 가라앉은 느낌, 목덜미에 물기 있게 달라붙어 시원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꽤나 청량해서 기분이 좋다.


젖은 머리가 마를 때까지 집안일을 했다. 설거지를 하고, 그릇 정리를 하고, 바닥을 청소하고, 물걸레질을 하고, 분리수거를 했다.

뭐가 더 남아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울린 꼬르륵 소리가 아직 밥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침 엊그제 시킨 통밀크래커가 있었고, 그릭요거트와 당근라페가 있었다. 만든 지 꽤 시간이 지나서 빨리 해치워야 했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통밀 크래커 위에 그릭요거트를 올리고, 그 위에 당근 라페를 올렸다.

통밀 크래커가 얇아서 부서지지 않게끔 꾸덕한 그릭요거트를 조심스럽게 올려야 했다. 단맛이 없는 그릭요거트라서 당근 라페에 알룰로스를 추가했고, 왠지 그래도 삼삼한 맛일 것 같아서 발사믹 글레이즈드를 추가로 뿌렸다. 노래를 틀고, 만든 점심을 분홍색 접시에 담아 서서 먹었다. 가벼웠다.

역시 음식은 취향대로, 기분대로 만들어야 맛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마쳤다.



새로 산 빳빳한 청바지와 연회색의 말랑한 맨투맨을 입었다. 머리는 반묶음을 해서 산뜻한 기분을 더 업그레이드했고, 짧은 패딩을 입고 아이보리색 양말을 신었다.

세상에 단 2개밖에 없는 파란색 에코백에 은색 키링을 달았고, 아이패드와 얇은 책 3권, 두꺼운 책 1권, 노트 2권, 필통을 챙기고선 집 밖으로 나왔다.

다시 추워진 날씨가 조금 힘들었지만, 오늘만큼은 찬 공기가 산뜻하게 느껴졌다.



카페에 가는 길에 작고 통통한 회색 고양이를 보았고, 카페 안에서는 작고 통통한 하얀 강아지를 보았다.

작고 통통한 귀여움을 마음에 담고 얇은 책을 보았다. 에그타르트를 먹었고, 책을 보다가 일기를 썼고, 따뜻한 드립을 한잔 더 마셨다.

진한 커피가 조금 어지러워서 따뜻한 물을 넣어 연하게도 마셨는데, 연해진 커피에서도 상큼하고 풍부한 향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좋은 향을 맡으면 나른해지는 경향이 있다.

커피의 향을 타고 나른해졌던 지난날들이 내게 찾아왔다. 추억을 꺼내볼 때 같이 딸려오는 무수한 감정들 사이에 더 이상 어둠이 크지 않다는 것은 일련의 시간들을 잘 보냈다는 뜻이겠지.

흠뻑 젖어서 도통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내 모습이 조금은 햇빛을 맞은 걸까, 자연스럽게 마른 머리카락처럼 보송해진 느낌이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책과 음악과 술 같은 사유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게 햇빛이었구나.

역시 나는 다시 일어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빛을 쬐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 해 먹어야지.

와인도 한잔 하면 좋겠다.

집으로 돌아갈 때 장을 보고 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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