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몇 개의 사건으로 속 시끄럽다. 교사 중 비주류인 특수교사가 간만에 주목받는데 오만가지 감정이 들고 끝은 쌉싸름한 안타까움뿐이다. 삭막하고 황량한 분위기 속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저 머리띠 두르고 목소리 내는 거 말고 말이다.
내가 쓴 언론기고문이 올라왔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며 괜히 뒷머리가 가려워지고 머쓱해진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잖아 하며 조용히 묻히길 바랐다. 아니? 잠깐만. 오히려 알리는 게 낫지 않을까?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이 진흙탕 싸움 속 특수교육 간판에 부정적인 말들로 더럽혀지고 있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씻어내고 싶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 한다. 나의 교단일기가 한 사람이라도 닿기를. 그 한 사람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조금이라도 웃음이 어려져 있길, 교실 속 녹음기 따위가 숨어 박혀있는 특수교육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교단일기] 필름의 비밀 요원들 - 원문 버전
“우리 영화를 제작해 볼 거야!”
불과 1~2초였지만 잠시나마 정적이 흘렀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는 듯한 학생들의 멍해진 표정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첫 수업을 마친 나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잠잠했던 내 마음이 요동치며 시끄러워졌다. 앞뒤 안 가리고 열정만으로 벌인 일은 아닌지, 영상편집 할 줄 안다며 자신감에 취해 벌린 객기는 아닌지, 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을 앞세운 헛된 믿음은 아닌지. 아! 어쩌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느낌이었다.
영화제작 수업을 하게 된 발단은 이렇다. 특수학교 자유학기제를 운영하게 되어 동아리 수업을 해야 했다. 당시 나는 체육 수업을 전담했기에 주위에선 체육 관련 동아리를 운영할 거라 예상했다. 나도 그럴까 싶었지만,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새로운 수업! 의미 있는 수업! 장애 학생도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을 외치며 찾은 것은 ‘단편영화’였다. 일반 학교 학생들이 제작한 단편영화는 줄지었지만 특수학교 사례는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실현 가능성이었다.
‘가능할까?’
머리를 세차게 굴려봤다. 마치 미션임파서블 같았다. 불가능을 가능하게끔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작전명: ‘필름의 요원들’
특수교육 대상 학생들에게는 국어, 수학 등의 인지적인 교과 내용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성, 의사소통 능력 등의 생활 영역 또한 수업 중 다루어야 할 중요한 지도 내용이다. 그래서 우선 각 반 학생의 특성에 적절한 생활지도 주제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시나리오에 따라 촬영하고 작품을 완성하며 자신을 돌아보도록 동아리 수업을 구성하였다. 단편영화 제작을 통한 생활지도 대작전을 도와줄 각 반의 특수교육실무사와 몇몇 학생들은 든든한 요원으로 임명되었다. 1반은 유독 자신감이 부족한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1반 영화 제목은 ‘자신감을 가져요!’로 정했다. 자신감이 부족하여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 자신감을 획득하여 즐겁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게 되는 내용이었다.
작전 시작! 하지만 첫 수업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학생들이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학생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수업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 카메라 싫어요.’
심지어 주인공으로 세우려 했던 민선이(가명)는 카메라 앞에 서기 싫다며 촬영 거부까지 했다. 생각지 못한 변수였지만, 작전에 실패할까 당황할 기색도 드러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민선이 대신 다른 친구를 앞세워 촬영을 진행했다. 어찌어찌하며 초반 촬영을 이어 나갔다. 시나리오의 초반은 다행히 작전대로 진행되었다. 대단한 연기력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상시 소극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 됐었다. 덕분에 NG 없이 빠르게 촬영됐다. 문제는 촬영 중반부터였다. 예상했던 문제다. 대본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조차도 어려워하는 ‘연기’를 장애 학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부딪혔다. 대본대로 촬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리는 처한 상황에 따라 맘껏 융통성을 발휘해 촬영에 임하였다. 한 문장이 어렵다면 한 단어로, 한 단어도 어려우면 한 글자라도 표현을 시도하였다. 촬영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정과 몸짓은 영화제작의 재료가 되었다. 남들이 보기엔 조금 어설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특수교육의 맛이라 생각했다.
촬영 회차가 거듭될수록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가만히 앉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영수(가칭)는 촬영 장비를 만져보려 스스로 걸음을 뗐다. 수업 시간에 무엇을 하든 고개를 절레절레했던 민석(가칭)이는 나의 손을 잡고 움직여 줬다. 참여가 가능할까 했던 예진(가칭)이는 명연기의 진수를 보여줬다. 시나리오 방향처럼 학생들이 점점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촬영 후반으로 갈수록 무미건조했던 학생의 표정과 몸짓은 생동감으로 채워졌다. 조용하기만 했던 수동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이런저런 대사를 추가로 넣자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제일 놀라웠던 건 민선의 변화다. 분명 민선이는 카메라 울렁증이라며 투덜대던 학생이었다. 거부를 넘어 짜증과 부정의 감정을 표출했던 학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씩 웃으며 “선생님, 오늘은 무슨 촬영해요?”, “선생님, 저도 해볼게요” 하며 관심을 보이고 참여하려는 것이었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했던 민선이 마음의 벽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기회다 싶어 폭풍 칭찬을 해주었다. 함께한 필름 요원들도 이에 가세했다. 영화의 대사가 그대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민선아! 자신감을 가지니 멋지다!”
껍데기를 깨고 알에서 나오려는 듯한 민선의 용기는 우리 모두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칭찬에 힘입어 민선이는 더 적극적이고, 더 즐거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해주었다.
촬영한 영상을 편집하여 단편영화가 드디어 완성됐다. 전교생에게 개봉하기 전, 우리끼리 영화시사회를 했다. 팝콘과 음료가 없어도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영화가 끝나며 엔딩크레딧이 나오는 순간,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부산 국제영화제 부럽지 않은 시간이었다. 작전 성공!
출처 : 세종의소리(http://www.sjsori.com)
"'선생님 카메라가 싫어요'했던 영수가 변했어요" - 세종의소리 (sj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