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버 콜라 피슈와 인어, 바다괴물들
들어가기에 앞서.
안녕하세요. 봄이 오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저는 요즘 주중 4일은 도심에서 떨어진 학교에서 일하고 목요일 저녁부터 금토일 주말은 도시에서 보내는, 이름하여 '4촌 3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일곱 날을 대략 반으로 나누어 도시와 시골을 둘 다 살고 있다 할 수 있는데, 한 번 오갈 때 두세 시간 걸리는 운전은 아무래도 힘들 때가 있지만 생활 자체는 (저 자신을 포함하여) 이전엔 평소 지각하지 못하던 여러 가지를 새롭게 만나고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요즘은 계절이 계절인지라 특별히 자연의 변화와 그에 따른 제 몸과 마음의 변화를 좀 더 예민하게 느껴보려 합니다. 도시에만 있을 때엔 몰랐던 점 중 하나는 시골의 봄 걸음은 도시보다 상쾌하다는 점입니다. 벌써 벚꽃이 만개한 도시와는 달리 시골로 다가오는 봄은 사뿐사뿐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곳에서의 삶은 사뭇 다르지만 모두 제가 살아야 할 저의 삶이라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아마도 상황이 만든 것이 확실할 '저만의' 논리 아닌 논리를 들어 오가는 마음에 말과 표현을 주고 마음의 형태를 결정화하는 순간. 그때부터 마음속에서 비교적 더 낫지 않은 곳에서의 삶을 향한 그 어떤 '불평'의 저주가 생겨날까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여기 쓰는 저의 글들에 대한 판단도 내려놓아봅니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패러다임이 담긴 지식도 아니고, 아무도 몰랐던 우주 원리의 신묘함을 밝히는 글도 아니며, 지난 역사 어느 순간에 대한 감추어져 있던 비밀도 아닙니다.
가끔 생각이 복잡하지만 다만 저의 시선이 여전히 어딘가를 향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그 무언가를 살펴보고 쓴다는 행위 자체에 다음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자고 마음자리를 다시 둡니다.
계절이 바뀌는 걸 바라보고 느끼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잠시 적어보았습니다. 모쪼록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글을 읽어주시는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글마다 무언가 담아보려고 오늘도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로마 시대에 분수가 작동할 수 있었던 원리와 분수가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역할을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분수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서도 들여다보았어요. 오늘날 관광명소로 수많은 방문객이 찾는 트레비 분수도 원래는 로마 시민을 위한 공공 빨래터였다는 점을 예로 보았습니다. 그 빨래터가 오늘날의 트레비 분수의 형태로 재탄생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입니다.
개보수 시도는 1629년부터 이루어집니다.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새로운 분수를 짓기 위해 베르니니에게 스케치를 요청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사망하면서 그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베르니니의 프로젝트는 결국 건설되지 않았지만, 이후 베르니니의 당시 디자인 영향력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 작업은 개보수 작업은 173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이 프로젝트가 완공된 후, 바로 오늘날의 관광명소처럼 바로 자리 잡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트레비 분수는 20세기에 들어서도 빨래터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수자원 관리가 체계적이지 않았기에 20세기 중반까지도 2024년,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그려보기 힘든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물에서는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사회시설물의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나만 더 이어가 보자면, 로마에는 오늘날 유명 관광명소이나 사회적 용도로 달리 사용될 뻔한 또 다른 건축물이 있습니다. 콜로세움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도시 로마를 근대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한 식스투스 5세는 구빈원을 짓고 공공시설 프로그램을 여러 가지로 계획하여 중세 동안 파손된 유물들과 노숙자들과 실업자들로 가득했던 로마 사회를 구제하려 합니다. 그중 한 방책이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양털과 실크 산업으로 로마 경제를 부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식스투스 5세는 로마 곳곳에 뽕나무를 심는 법을 제정하고 콜로세움을 양털을 가공하는 방직시설로 변형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합니다. 지상층은 작업장으로, 상부층은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마차 70대와 인부 100여 명을 동원하여 도로를 평탄화하는 작업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1년 뒤 그가 사망하면서 프로젝트는 무산됩니다. 식스투스 5세가 계속해서 살아 있었다면 콜로세움은 최초의 근대적 노동자 주택과 대규모 제조공장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물과 다이빙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유럽에서 프리다이버들은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했습니다. 덴마크에서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프리다이버들은 숨을 참고 바다로 들어가 적의 함선의 닻 줄을 자르고 배의 선체에 구멍을 뚫고 포위된 해안 도시에 물자를 공급을 운반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있었던 프리다이버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전설로 전해지는 인물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수중에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은 특별한 것으로 여긴 것이 분명합니다.
중세 시대에는 특별히 널리 알려진 전설 속 프리다이버가 한 명 있습니다. '물고기 콜라'라는 뜻의 '콜라 피슈(Cola Pesce)' 혹은 '물고기 니콜라스(Nicholas Fish)'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콜라 피슈 설화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아일랜드 신화 속 영웅 쿠훌린, 북유럽 게르만족의 영웅 베오울프, 노르웨이의 국왕 올라프 등 역사 속 위대한 이들과 견주어지는 콜라 피슈는 12세기 시인 레몽 조던(Raimon Jordon of Provencal, fl. c. 1178–1195)에 의해 문학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레몽 조던은 '바리의 니콜라스(Nicholas of Bari)'라는 인물을 언급하며 물고기들과 함께 살았다고 말합니다.
중세 시대의 역사학자로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신하였던 월터 맵(Walter Map) 또한 '니콜라스 파이프(Nicholaus Pipe)'라는 동일한 인물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이 인물은 보통 사람처럼 보였지만 인어(merman)였습니다. 오랜 기간 바다에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배들에게 폭풍을 경고했습니다. 시칠리아의 왕 윌리엄 1세는 그를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니콜라스 파이프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없었고, 잡힌 후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영국의 정경 변호사이자 정치가, 성직자였던 틸버리의 저바세(Gervase of Tilbury, 라틴어: Gervasius Tilberiensis, c. 1150–1220)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탈리아 아풀리아(Apulia)의 니콜라스 파파(Nicholas Papa)는 시칠리아 왕 로저(Roger of Sicily)가 바닷속을 탐험하도록 보낸 숙련된 선원이었으며,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해저에서 나무와 계곡, 산을 보았다고 보고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해저협곡과 심해저 평원 등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밝혀져 알려져 있지만, 가상이건 실제이건 12~13세기의 인물 니콜라스 파파는 정말 깊은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이 모든 것을 보았을까. 궁금해집니다.
스타벅스 로고 이야기는 잘 아실 테니 굳이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마치 물고기 같이, 남자 인어 머맨으로 알려졌던 콜라 피셔와 같은 인어는 사실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나타나는 생물입니다. 일반적으로 인어는 상반신이 여성이고 하반신이 물고기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때로는 약간씩 다릅니다.
인어에 대한 최초의 알려진 이야기는 기원전 1000년경 아시리아에서 나왔습니다. 아시리아 여왕 세미라미스(Semiramis)의 어머니였던 여신 아타르가티스(Atargatis)는 인간을 사랑하다가 실수로 그를 죽여버리고 맙니다. 마음이 상한 아타르가티스는 호수에 뛰어들어 물고기의 모습을 취했지만 물속에서도 그녀의 신성한 아름다움은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허리 위는 인간, 아래는 물고기인 인어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여동생 테살로니케(Thessalonike)가 죽은 후 그녀가 인어로 변했다는 그리스 전설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어느 배에서든 선원들에게 단 한 가지 질문만 하곤 했습니다.
"알렉산더 왕이 살아 있나요?"
선원들이 “그분은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며 세상을 정복하십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녀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배를 보내주지만, 다른 대답을 하면 격노하여 끔찍한 폭풍을 불러일으켜 배와 탑승한 모든 선원을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한편, 노르만 잉글랜드(Norman England)의 색슨(Saxon)이라는 석공이 1078년경 더램성(Durham Castle)에 지은 예배당에서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인어상 중 하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 민간 설화에서 인어는 재난을 예언하기도 하고 재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맨 섬에서 전해지는 여러 설화 속 인어들은 도움이나 선물을 주는 것으로 그려져 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는 이야기 속 인어들보다 인간에게 더 친절한 캐릭터로 여겨집니다.
중세 서유럽에서 인어는 종종 사악하고 음탕한 생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당대 만연했던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그들이 남성을 죄로 유혹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부는 아마도 교회가 정복된 지역에서 기독교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고 이교 이미지를 근절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종교인들에게 민속 이야기 가운데 사악한 인어 이야기는 신도들을 계도하기 위한 도구적 이야기로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인어는 기독교 세계관에 어긋났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했습니다.
인어에 대한 많은 중세 묘사에서는 그들이 인어의 죄 많은 허영심을 상징하는 빗과 거울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정욕과 유혹의 상징이 되었고, 그들의 아름다움은 젊은이들을 속여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중세 교회에서 인어 묘사의 빈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중세 인구는 문맹이었고 미사의 언어인 라틴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 주변의 이미지는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인어의 그림과 조각품은 회중에게 정욕과 교만의 죄를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멜루진은 중세 시대에 널리 알려진 물의 정령입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멜루진은 숲 속의 호수와 개울에 사는 요정, 정령, 인어의 모습을 했습니다. 어느 날, 잘생긴 귀족(전설을 전하는 사람에 따라 신분이 바뀜)이 멜루진을 만나 결혼을 권유했습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하루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이날은 남편이 절대 그녀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남자는 동의했고, 그들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슬하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남자는 멜루진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몸을 숨깁니다. 그는 그녀가 물속에서 물고기(때로는 뱀)의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멜루진은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도망칩니다(일부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도망치기 전에 용으로 변하고 불만스러운 영혼으로 자신과 남편을 위해 만든 마법의 성을 저주합니다).
좀 더 나아가면 중세 시대 사람들의 상상력이 잔뜩 묻어나는 해양 괴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도제작 전문가 체트 반 두저(Chet Van Duzer)의 책 "중세와 르네상스 지도의 해양 괴물(Sea Monsters on Medieval and Renaissance Maps)"는 고지도와 해양 괴물들을 깊이 있게 분석한 것으로, 아래 고지도에는 숨을 참고 바다로 들어가 진주조개를 줍는 프리다이버들이 바다괴물들에 놀라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중세에는 상상력으로 다양한 장비들이 그려지기 시작한 때이기도 합니다. 당대에 그려진 이미지들을 살짝 보시고, 다이빙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갈게요.
프리다이빙-
1일 체험 과정도 있답니다.
[알로하 프리다이브]
- 인스타그램: @alohafreedive
- 알로하프리다이브 홈페이지: https://www.kimwolf.com/freed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