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울프와 알렉산더 대왕을 거쳐 수도승들의 목욕 이야기까지
이번 글에서는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해양 탐험에 관한 중세 시대 사람들의 빛나는 상상력, 다음으로 중세 시대에 물을 다루는 건축적 방식입니다.
중세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끊임없이 수중 세계의 비밀을 탐험하고자 하는 상상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흔히 해양 탐험에 필요한 근대적 장비들의 많은 부분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발명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해 최초로 설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9년 6월 7일~9월 8일까지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 특별전시 <<Leonardo da Vinci: A Mind in Motion>>에서도 다이빙을 위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발명품 스케치를 선보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앞서 바다를 탐험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중세는 신과 종교 중심의 시대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시대 사람들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수중 세계를 탐험하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수중 탐험 장비를 구상한 것은 유명하지만,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상상력을 수면 아래로 떨어뜨린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중세 사람들이 수중 탐험을 상상했던 몇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앵글로색슨 시대의 수중탐사와 베오울프의 영웅적 모험
앵글로색슨 시대에 수중탐사는 현대적인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영웅시의 바탕이 되는 모험적 세계관에 속하는 상상의 이야기였어요. 특히 고대 잉글랜드 서사시인 베오울프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그란델은 베오울프가 마주하는 첫 괴물입니다. 그란델의 어머니도 괴물이고요. 서사시에서 베오울프는 그렌델의 어머니와 싸우기 위해 전쟁 장비를 갖추고 무시무시한 호수 밑바닥에 있는 그녀의 수중 은신처를 찾아 물에 뛰어듭니다.
호수 깊은 곳에서 베오울프와 그렌델의 어머니는 격렬한 싸움을 벌입니다. 둘은 오랜 시간 동안 엇비슷하게 서로 대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베오울프가 고대 거인들이 만든 거대한 검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순간, 검을 잡고 휘둘러 그녀의 머리를 공격합니다.
이 서사시는 베오울프가 어떻게 물속에서 숨을 쉬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전설적인 영웅이자 현존하는 가장 강한 남자로서 그는 인간 능력의 일반적인 한계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거인, 용, 마법의 검, 저주받은 보물이 가득한 세계에서 영웅은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베오울프는 어떠한 도전에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 다이빙 장비?! 필요하지 않아요.
(2)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 모험
중세 문학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수중 모험은 알렉산더 대왕의 모험입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왕이자 강력한 군 사령관은 중세 로맨스의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었습니다. 로맨스 전통에서 알렉산더와 관련된 한 에피소드는 그가 바다의 경이로움을 탐험하기 위해 바다 밑바닥으로 여행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베오울프와 달리 알렉산더는 숨을 쉬어야 하는 현실 세계의 필요성 때문에 방해를 받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유리로 만든 밀폐형 배럴 잠수함을 설계합니다. 잠수정은 배에 체인을 걸고 수중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살펴볼 만한 점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잠수정에 가지고 간 것들입니다. 그는 바다에 잠수할 때에는 램프와 세 마리의 동물 친구들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램프는 바다 밑이 캄캄할까 봐 필요하다 생각했으니 납득이 갑니다. 그의 선택을 받은 동물들은 수탉과, 고양이, 강아지인데요. 이들은 애완동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수탉의 역할은 예상 가능합니다. 일단 램프를 챙겼으니 빛은 있을 텐데, 문제는 시각을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수탉을 데리고 가면 때에 맞춰 울 것이기 때문에 몇 시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고양이는 공기 정화용이었습니다. 웬일인지 알렉산더 대왕은 고양이가 공기를 깨끗이 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아지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좀 슬픕니다. 강아지는 긴급상황 용이었습니다. 물밖으로 나와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알렉산더 대왕은 강아지를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더러운 것을 깨끗이 하는 물의 정화 작용으로 인해, 물은 강아지 시체를 물밖으로 내보내려고 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알렉산더 대왕도 물밖으로 위기 탈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기록은 그러한데 다행히(?) 그림에서 강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Nicole Eddy, Lolcats of the Middle Ages, Medieval manuscripts blog of the British Library)
알렉산더의 수중 여행은 중세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이 물속에서 안전하게 모험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그가 설계한 잠수함 배럴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선, 배럴은 밸러스트가 없어 떠 있을 것입니다.
다른 그림을 보겠습니다. 역시나 크지 않은 잠수 공간에 알렉산더 대왕이 앉아 있고, 고양이와 수탉이 보입니다. 이 그림에도 강아지는 없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무슨 이유로 고양이가 내쉬는 숨이 공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지식으로 확언컨대, 고양이는 공기청정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양이는 물론, 수탉도 산소를 소모하니 실내 이산화탄소 농도만 높아져 알렉산더 대왕에게 할애되는 산소량은 매우 제한적일 것입니다.
게다가 이 작은 공간에서 수탉이 운다면?! 매우 시끄럽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심성 많은 고양이는 이미 작은 공간에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수탁이 울면 놀라서 팔짝 뛰거나 하악질을 하며 카오스가 펼쳐지지 않을까- 저만의 상상세계를 펼쳐봅니다.
15~16세기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실용성을 염두에 두고 다이빙 장치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15세기에 무명 이탈리아 엔지니어가 편찬한 스케치북에는 레오나르도에게 영감을 주었을 수도 있는 잠수복 디자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잠수복은 배럴보다 사람의 움직임을 더 자유롭게 해 주기 때문에 다이버는 바다에서 필요한 것을 바구니에 담아 오는 등 수중 작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엔지니어는 한쪽 끝은 수면에 연결되고 다른 쪽 끝은 다이버의 마스크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 공기를 공급하여 호흡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설계한 잠수복 자체는 현대에 채택된 디자인과 유사하지만 공기를 다루는 방식에서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엔지니어는 물아래로 깊이 내려갈수록 증가되는 수압으로 인해 다이버에게 공급되는 공기에도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죠. 일정한 온도에서 기체의 압력과 부피는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은 1662년, 17세기에 밝혀집니다.
17세기에 밝혀진 이 지식은 오늘날에도 다이빙을 하는 데 알아야 할 필수 지식 중 하나입니다. 프리다이빙 기초과정 이론 교육을 할 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내용에 포함되기도 해요. 아프지 않고 안전하게 프리다이빙을 하기 위해 중요한 내용입니다. (간단하게 치러지는 이론시험에도 나와요!)
깨끗한 물에 대한 접근성은 사람이 사는 곳의 기본 요구 사항입니다. 중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은 개인 가정, 수공업, 산업, 방앗간, 축산업, 양조산업 등에 꼭 필요한 자원이었습니다.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기 위해 저연환경적으로 물과 가까운 곳, 즉 하천과 강 옆으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하천과 강은 물을 공급하는 역할에 더해 도시 경관의 요소를 연결하고 분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탄생 무렵 로마 제국은 "철학, 금융, 전문군대, 문학, 장대한 건축물은 물론 쓰레기 수거장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나, "라인강 서쪽과 도나우강 이남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유럽지역은 소규모 정치체들로 구성된 이들이 생존 수준의 농업을 영위하는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그 지역의 태반은, 일부 종족만 철제 도구와 무기를 갖추고 있었을 뿐 나머지 대부분은 나무 연장으로 농사를 짓고, 글도 모르고, 석재건물도 짓지 못하는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동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상황은 더욱 열악하여 철제도구도 보기 드물고, 농업생산성도 떨어지고, 인구밀도도 낮았[습니다.] 그것이 서 유라시아의 고대세계, 지중해 유역이 북부 유럽의 미개한 지역 위에 군림하고 있던 고대 세계의 모습이었습니다.(피터 히더, 로마 제국과 유럽의 탄생, 다른 세상, pp.15~16)
그러나 1천 년 후 고대세계 질서는 야만의 상태를 벗어납니다. 서로 다른 여러 삶의 방식이 동질화하며 오늘날 유럽의 양상에 한층 가까운 모습으로 바뀌어갑니다. 그럼에도 로마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과학 기술이나 건축 토목술은 로마가 성취한 수준 이상으로 크게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십자군은 경로를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이 만들어놓은 기술을 유지하기만 해도 사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중세에는 공학 기술이 전무했는가. 그건 아닙니다. 일부에서 지하 하천의 방향을 바꾸는 매우 정교한 배수 시스템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어 중세 공학 기술 수준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입니다.
기본적으로 물을 분배하거나 깨끗한 수질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유지됩니다. 일례로 대부분의 토지에는 배설물 처리를 위한 오물통이 있었습니다.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담수 공급 및 위생 시설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수질 모니터링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신선하고 깨끗한 물에 대해 기록한 문헌과 깨끗하고 값비싼 공공 분수를 예찬한 고문서들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괴팅겐과 같은 북부 독일 도시에서는 개인 우물과 수도관과 같은 공공 기반 시설을 통해 물이 공급되었습니다. 두 가지 모두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와 실례가 존재합니다. (Arndt, Betty. (2020). 13. Medieval and Post-Medieval Urban Water Supply and Sanitation. 10.1515/9783110677065-013.)
13세기에 런던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물을 더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거대한 수도관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다른 도시에서는 상당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을이나 도시의 지리적 위치도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수도관을 더 크고 새롭게 건설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굳이 새로 무엇을 짓기보다 이주를 결정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오르비에토(Orvieto), 페루자(Perugia), 스폴레토(Spoleto)와 같은 마을은 수로를 건설했지만, 올드새럼(Old Sarum) 공동체는 물 부족에 직면했을 때 에이본(Avon) 강 가까이로 이주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올드새럼에서 이주하여 새롭게 자리 잡은 마을은 뉴새럼(New Sarum) 또는 솔즈베리(Salisbury)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뉴새럼은 잉글랜드 솔즈베리의 공식명입니다.)
마찬가지로,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와 같은 북유럽 국가의 습지대에 있는 도시도 부드러운 하층토를 파내고 인공 수로 네트워크를 설치하여 물을 공급을 받았습니다.
앞서 로마를 살펴보며 로마인들이 목욕을 즐겼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씻는 일은 중세 시대에도 중요했는데, '의료'의 의미가 더해져 흥미롭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목욕이 사회적 일이었습니다. 중세 후반에 네덜란드와 독일지역에서 목욕탕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오물을 제거한 의미 이상을 두고 목욕탕을 찾았습니다. 목욕탕에는 독일어로 '바더(Bader)'라고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더는 '목욕(bath)'을 의미하는 독어 'bad'에서 나온 말로 원래는 목욕탕의 주인이나 수행원을 일컬었으나 후에는 머리를 자르고 면허를 취득한 의료자로서 농양을 치료하거나 치과 치료를 하는 등 기본적인 의료서비스 일을 맡았습니다.
목욕탕에서는 한증막, 미네랄 목욕, 부항 및 허브 혼합물 등이 옴과 나병, 편두통과 유산에 이르는 질병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목욕탕이 공중 보건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역사학자 야나 쿠만(Janna Coomans)에 따르면, 목욕탕은 중세 사회에서 의료 서비스의 대안으로 기능했습니다. 당시 의사들이 청구하는 비용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목욕탕 바더들은 대체의학으로 담즙, 혈액, 황담즙, 흑담즙으로 이루어진 네 가지 "체액"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한의학에는 지식이 없습니다만 한 번씩 들어본 사상체질이나 오행이론을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유럽 중세시대의 관행은 보기에 따라 현대의 기준으로는 의문이 드는 점들도 있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인구의 상당 부분이 건강과 위생 기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목욕탕은 중세 지역 사회에서 강력한 사회적 위치를 유지했으며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목욕탕의 인기는 대도시가 성장하고 건강 상태가 악화됨에 따라 공중 보건 서비스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쿠만 와 동료 역사학자 가이 겔트너(Guy Geltner)가 중세 도시 위생에 관한 논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지방 당국은 의료 종사자와 위생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태도를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을 고안하여 지역민의 건강을 증진하고 질병을 억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쿠만과 겔트너는 더 건강한 도시환경을 조성하고 도시 거리에서 악취를 제거하려는 초기 시도 가운데 이와 같은 목욕탕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목욕탕은 당대의 의학적 지식과 이론을 도시 정책으로 전달하는 벡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료 목적을 차치하고서라도 중세 사람들에게 목욕탕은 인기가 높았습니다. 런던에서 템스 강 반대편에 있는 마을인 서더크에서는 온수 욕조가 18개나 갖추어져 있어 개인이 어느 것을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작은 마을에도 목욕탕이 있으며 종종 지역 빵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빵집 오븐에서 나오는 열을 활용하여 물을 데우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버지니아 스미스는 자신의 저서 <<Clean: A History of Personal Hygiene and Purity>>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5세기에는 많은 마을 목욕탕에서 목욕 잔치를 벌이는 일이 4세기 후에는 식당에 가는 일만큼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15세기 독일의 목욕 에칭화에는 마을 목욕탕이 자주 등장하는데, 길게 줄지어 늘어선 목욕하는 커플들이 욕조에서 알몸으로 식사를 하고, 종종 여러 커플이 욕조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다른 커플들은 중간 거리에 침대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중세 사람들은 목욕을 진지하고 신중한 활동으로 여겼습니다. 의학 논문 <Secreta Secretorum>에는 목욕에 대한 전체 섹션이 있는데요. 봄과 겨울은 목욕하기 좋은 시기이지만 여름에는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하며, 또한 지나치게 긴 목욕은 비만과 피로를 초래한다고 경고합니다. 한편, 마그니니우스 메디오라네시스(Magninius Mediolanesis)는 노령, 임신, 여행 등 특정 조건에 사용할 수 있는 57가지 이상의 목욕 처방을 제안합니다.
일부 유명한 목욕 장소에는 자체 규칙이 있었습니다. 1336년 피에트로 데 투시냐노(Pietro de Tussignano)는 스위스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 마을인 부르미(Burmi)에 오는 사람들이 목욕의 치유 효과를 얻기 위해 12가지 규칙을 제정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공복 상태로 목욕에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됩니다. 음식을 먹어야 한다면 건포도 두 스푼과 약간의 와인 정도가 권장됩니다. 너무 배부른 상태에서 물에 들어가면 구토가 날 수도 있고,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서인데, 사람 몸은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밥을 가득 먹고 바로 수영장에 들어가면 힘듭니다. 프리다이빙에서도 적어도 두 시간 전에 식사를 마칠 것과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고기류나 위산이 역류할 수 있는 신 맛의 과일류는 피할 것을 권장합니다.
깨끗하게 면도한 경우에만 머리 위로 물을 부을 수 있다는 규정도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물의 치유 효과를 방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5일 동안 하루에 최대 한 시간, 정성스레 목욕한 사람은 건강이 개선되어 6개월 이상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개인 욕조를 갖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있다면 그 위에 텐트 같은 천을 덮을 수 있는 나무 욕조를 사용했습니다. 도우미가 욕조를 채울 뜨거운 물을 냄비와 주전자에 채워 손수 욕조를 채웠지요.
중세 시대의 수도원의 목욕 문화도 독특합니다. 부유한 수도원에서는 파이프를 통해 물을 공급받아 목욕을 할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된 시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수도원에서 목욕이 자유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수도사들은 연간 네 번, 크리스마스, 부활절, 6월 말, 9월 말에 목욕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규칙이 엄격하게 준수되었는지, 아니면 단지 이 시기에만 목욕할 수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목욕 도우미를 고용해 매일 빵 두 덩어리와 연간 1파운드의 봉급을 지급했다는 사실은 목욕 서비스가 정기적으로 이용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후 몇 세기 동안 목욕탕은 지속적으로 지역민들이 찾는 곳으로 자리매김합니다. 16세기에 유럽이 전염병, 천연두, 매독으로 황폐화되고, 전염병에 대한 이론이 의학계에서 더욱 널리 논의되면서 도시의 목욕탕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와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가 1880년대에 질병의 세균 이론을 확고히 하기까지는 300년이 더 걸렸지만 사람들은 대중목욕탕과 기타 혼잡한 장소를 피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바로 얼마 전, 목욕탕, 사우나 등 공기질 관리에 특히 신경 써야 하는 곳들이 더욱 주의를 받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달리기를 좋아하고 잘하는 남편은 오늘 아침 보스턴으로 떠났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함께 공항에 가서 배웅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달리기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올림픽 때부터 경기 종목이었습니다. 신체에 서려 있는 신의 축복을 누가 더 많이 받았는지를 가려내는 대회였지요. (생각해 보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순간이 축복입니다만..)
아테네 근대 올림픽이 시작한 다음 해인 1897년에 제1회가 개최된 이후로 126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보스턴마라톤. <<1947 보스턴>> 영화에서처럼 대한민국 육상 역사에 의미 있고 2001년 이봉주 선수가 우승하기도 했던 대회에 참가한다니, 고대에서부터 흘러오는 몸의 움직임과 근현대사를 내 모든 세포들의 진동, 내 것으로 만드는 삶이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14시간을 간다는 비행기가 안전하게 잘 도착하길 바라면서 오후 시간 동안 중세시대 이야기를 적어보았습니다. 아픈 데 없이 재밌게 뛰고 오길 응원하는 마음입니다.
달리기 잘하는 프리다이버에게 프리다이빙을 배워보세요. 프리다이빙에 푹 빠질 정도로 재밌게 가르쳐줄 거라 확신합니다. 제가 그렇게 배웠거든요. 요청하시면 부상 없이 안전하게 즐겁게 달리는 팁도 배우실 수 있으십니다. ^^
혹은 저도 프리다이빙 강사입니다만, 김울프 선생님 일정이 바빠지고 있어요.
조용조용한 저도 괜찮으시다면 저와 해보셔도 좋습니다. 저도 프리다이빙 좋아해요.
왜 좋은지 각자가 찾아가는 여정. 직접 해보시고 느껴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꼭 해보지 않으셔도, 글을 읽으시고 프리다이빙과 같은 몸의 움직임과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것도 정말 감사합니다.
[알로하 프리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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