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감수정
문화공감수정은 부산에서도 역사적인 근대건축물이 특히 많이 남아있는 동구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입니다. 이름만으로 세련된 현대식 건축물을 기대했다면 오산이에요. 부산도시철도 1호선을 타고 부산진역에서 내린 후, 3번 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오르막 골목길을 걷다 보면 흰 담장 너머로 옛 건물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내후성 강판에 새겨진 문화공감 수정. 붉은 녹이 예쁘게 났습니다. 계단을 올라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일본식 목조 2층 기와건물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정란각貞蘭閣'이라 불리던 이 건물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부산에 거주했던 일본인 부산철도청장의 관사였습니다. 광복 이후 이곳을 한국인이 인수해서 고급 요정으로 운영했고, 대략 1960~70년대 전후로 성업했습니다. 이 건축물은 역사를 잊지 않고자 관리·보존 차원에서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도시환경에 그 모습이 심하게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으로 2010년 문화재청에서 이 건물과 부지를 매입하였고, 이후 2012년 특수법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의 관리를 받습니다. 2016년 6월 문화유산국민신탁과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동구노인종합복지관이 함께 문화공감수정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여 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이 위치한 초량 일대는 원래 전통한옥과 일본식 가옥이 공존했던 지역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일대는 왜관지역으로서 17세기부터 일본인들의 출입이 잦았습니다. 왜관은 일본상인들의 중계무역지인 동시에 국제적인 업무를 위한 외교 특구였고, 이곳을 통해 외교·경제·문화 등에 걸쳐 활발한 교류가 있었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은 본격적인 개항장으로 탈바꿈합니다. 이후 부산항일본인거류지계조약이 체결되면서 기존의 초량왜관은 일본인 외교관들이 머무르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로 개방됐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옥인 기와집을 개보수하여 주거 혹은 업무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일본식 가옥을 신축하여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건물은 이러한 역사의 단편을 잘 보여줍니다.
영화 <장군의 아들>, <범죄와의 전쟁>, 가수 아이유의 <밤편지>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알려진 이 건물은 건축적인 면에서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이 건물은 일본 사무라이[武士] 계급의 전형적인 주거양식으로서 16~17세기 모모야마[桃山] 및 에도[江戶] 시대에 걸쳐 확립된 쇼인즈쿠리[書院造] 건축양식입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건물 앞으로 펼쳐진 작은 정원과 진입로 군데군데 깔린 박석, 그리고 건물을 따라 형성된 골이 깊은 수로가 눈에 띕니다. 쇼인즈쿠리 양식의 특징 가운데 크게 두드러지는 것은 자유로운 평면분할로 인해 실내로 유입되는 빛의 표정이 풍부하여 공간에 대한 인상이 다채롭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점은 가변적인 공간구획을 가능하게 하는 후스마[襖]의 영향이 큽니다.
일본건축에서 나무를 짜서 틀 양면에 헝겊이나 종이를 두껍게 바른 문을 지칭하는 후스마는 큰 덩어리의 공간을 필요에 따라 분할할 수 있는 벽과 문의 역할을 동시에 담당합니다. 후스마를 사용하면 자유롭게 내부공간을 운용함으로써 유입광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창호지의 백색, 창호지를 통과하면서 좀 더 그윽해지는 햇살,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일본식 옻칠 우루시[漆]의 어둑한 색채 및 다다미가 지닌 은은한 연녹황색이 어우러져 아늑하고 은근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19세기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공간예찬>>에서 음예를 그리며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김지견 옮김, 발언, p.36)이라 했는데요. 일본 건축물 실내공간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어둑한 빛과 분위기는 후스마와 우루시, 그리고 다다미의 조화라 할 수 있습니다.
후스마는 또한, 구분된 공간에 위계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여러 개의 후스마를 거쳐 내부로 깊이 들어갈수록 외부인의 접근이 어려워지고 공간의 위계가 상승합니다. 이렇게 일본 전통건축에서 높은 위계를 가진 비밀스러운 내부 공간을 오쿠[奥]라 부릅니다. 이 건물에서도 이렇게 형성되는 공간의 위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건물 2층에는 약간의 단차를 두고 만들어진 중간층이 있습니다. 이 공간은 주계단과 분리된 이동통로가 있으며 문간방 형식의 작은 방이 있는데, 이는 과거 이 건물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일 것이라고 합니다.
건물을 둘러본 다음, 어느 한편에 자리를 잡고 편히 앉았다면 문을 열어두고 툇마루 엔가와[緣側] 건너 보이는 바깥 풍경을 감상해 봅니다. 빛의 다채로움과 창틀 하나, 처마 끝에서도 올올이 떨어지는 옛 건물의 정취가 건물 밖의 현대적 분위기와 뒤섞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전통한옥과는 전혀 다른 공간을 선보이며 관광객, 지역민들의 새로운 쉼터,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문화공감수정은 역사가 녹아있는 근대 일본식 건축문화 체험과 더불어 전통 차와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선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