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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물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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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Jul 19. 2024

맑은 물의 상징과 건축의 나르시시즘

건축적 자아의 표현과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형성

“물과 꿈”에서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맑은 물'에 관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그의 해석은 단순한 물리적 요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인간의 내면과 상상력의 깊이를 반영하는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슐라르는 맑은 물의 상징을 통해 세계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상상력의 힘을 강조했으며, 이는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방식에서 내면의 욕망과 이상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계적 힘은 건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건축에서 나르시시즘, 또는 '군주병'(프린스 컴플렉스)이라고 불리는 심리적 패턴은 건축가의 개인적 자아와 비전이 어떻게 그들의 작업에 투영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건축가가 자신의 스타일과 철학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거나, 자신만의 '왕국'을 구축하려는 욕망은 건축물의 디자인과 실천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건축에서의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개인의 자아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 그 자아가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드러냅니다. 건축가는 자신의 상상력과 자아를 통해 공간을 창조하고, 이러한 창조 과정은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반응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과정임을 의미합니다.

바슐라르의 맑은 물에 대한 해석과 건축에서의 나르시시즘은 건축이 단순히 기능적이거나 미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건축가는 자신의 개인적 비전과 상상력을 통해 공간을 창조하고, 이러한 과정은 깊은 내면의 욕망과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는 창조적 작업임을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건축과 나르시시즘의 관계를 탐구하고, 건축에서의 상상력과 자아 표현의 복잡한 관계를 살펴보려 합니다.


맑은 물의 상징과 나르시시즘

깨끗하고 맑은 물은 순수함의 상징으로, 물의 물질적 이미지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시각적인 이미지에만 그치지 않고, 갈증을 풀어주는 미각적 체험, 몸을 씻을 때 주는 신선함의 촉각적 체험이 함께 작용하여 이상적인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맑은 물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반영하는 거울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나르키소스, 얀 코시에르(1600-1671), 프라도 미술관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샘물의 거울 이미지를 통해 심리학에서는 '나르키소스 콤플렉스'라는 자기애의 증상을 이끌어내지만, 바슐라르는 나르키소스가 물에 빠진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샘물에 비친 세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기존의 나르시시즘은 개인의 자아와 욕망이 세계를 이해하고 형성하는 중심이 된다고 가정합니다. 이로 인해 개인은 자신의 자아를 기준으로 현실을 왜곡하거나 단순화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아 중심적 세계관은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배제하고, 사회적 다양성과 복잡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르시시즘은 현실을 제한적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관점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은 타자,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아의 반영으로 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강화하려는 경향도 보입니다. 이로 인해 타자는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나 배경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타자의 존재와 감정을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존중하는 대신,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건강한 인간 관계를 구축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나아가 사회적 가치와 규범을 경시하며, 실질적 문제 해결을 회피하는 경향으로 설명되지만 바슐라르는 거울의 이미지와 나르키소스 신화의 맑은 샘물에 비친 반영을 비교 분석하여 나르시시즘의 이상화와 우주적 나르시시즘으로의 승화를 설명합니다.

거울은 문명화되고 기하학적인 물건으로,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여 냉정하고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 샘물의 거울은 비친 그림자를 약간 흐리게 하고 색을 바래게 하여 실제의 모습에서 많은 부분을 지워버립니다. 이 지워진 부분은 상상력으로 채워지며, 우리는 샘물의 거울에서 상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제 사물이 상상력을 통해 더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나르키소스는 물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이 미완성임을 깨닫고, 이를 완성하려는 갈망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이상을 위한 승화작용으로 나타나며, 샘물의 거울은 열린 상상력의 계기가 됩니다. 샘물은 불완전한 영상을 보여주기에 상상력을 자극하며 ‘살아있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차갑고 선명한 이미지를 주는 거울에 비해 물은 우리의 이미지를 ‘자연화’하고, 물질화된 상상력을 통해 물의 거울을 자연스럽고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상상하게 합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이상화된 자기중심적 나르시시즘은 우주적 나르시시즘으로 승화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르키소스가 물속으로 들어간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 비친 에코와 사랑에 빠져서가 아니라 물 위에 비친 세계와 하나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르키소스는 자기 자신만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포함된 숲 전체, 하늘 전체인 세계 전체의 풍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전체적인 세계의 풍경은 하나의 환상이며 명확하지 않은 이미지로 나타나 절대로 고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의 거울은 나르키소스 자신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나르키소스는 그 풍경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우주적 나르시시즘은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이 확장된 것으로, “자연이 아름다우므로 나는 아름답다. 내가 아름다우므로 자연은 아름답다.”라는 창조적 상상력과 자연의 모델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나르키소스는 우주적 아름다움에 눈을 뜨며, 자신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세계와 우주가 아름답다고 상상하게 됩니다.

인공의 거울은 평면적이며 모든 것을 명확히 보여주기에 비춰진 반영 이상의 것을 꿈꾸지 못합니다. 반면, 물의 거울은 표면과 깊이를 지니고 흐릿하고 자연스러운 영상을 보여주기에 우리는 몽상을 통해 이상적 형상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샘물 위의 이미지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 세계의 이미지가 창조되는 것처럼, 우리가 물질과 만나는 ‘참여’에 의한 상상을 시작할 때 물질과 우리의 내면은 상호작용을 이루며 세계를 보고 우주를 느끼게 됩니다.


건축에서의 군주병 혹은 프린스 컴플렉스

가스통 바슐라르의 '맑은 물' 해석과 나르시시즘은 상상력의 힘을 통해 세계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중요한 개념들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건축에서도 나르시시즘적 요소가 작용합니다. 그러나 건축에서 나르시시즘은 종종 '군주병' 또는 '프린스 컴플렉스'라는 심리적 패턴과 연관되어 연구됩니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 이론은 최근 군주의 연대기를 넘어서 대중의 역사와 일상생활, 구체적 조건들에 대한 연구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파도의 표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깊이의 거대한 움직임을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건축 상상력은 여전히 군주들의 나르시시즘적 역사에 갇혀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에 따르면,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군주론(The Prince)』은 정치적 실천을 위한 지적 장치를 제공하며, '행운'(fortuna)이라는 불확실성을 제어하려고 했습니다. 군주는 미래의 무작위성을 통제하기 위해 '부정성'과 '객관성'을 요구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를 “발명”해낸 것이 아니라, 정치적 내러티브의 재현적 성격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말한 군주는 권력이나 진리 자체가 아니라, 권력이나 진리의 공적 이미지입니다.

'프린스 컴플렉스'의 경우, 일반적으로 '공주병' 또는 '공주 증후군'의 맥락과 유사한 개념으로, 자아가 과도하게 부풀려지고 물질적 부와 사치를 중시하며 '공주' 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을 설명합니다. '공주병'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여성의 나르시시즘과 물질주의를 나타내는 용어로, 특히 급속한 경제 성장 시기에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확산되면서 나타났습니다. 유사한 성향을 보이는 남성은 '왕자병'이라고 불리며, 이는 남성의 나르시시즘과 물질주의적 태도를 반영합니다.

건축 이론도 오랫동안 '군주' ‘혹은 ‘프린스’ 역할을 하는 인물들에 기반해 왔습니다. 건축가의 대표적 건축 스타일은 나르시시즘적 인식론에 불과하며, 많은 건축가들은 자신이 나르키소스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군주들의 연대기를 반복하는 포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타푸리(Tafuri)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그의 아내의 재산을 모두 사용하여 '탈리신 펠로우십(Taliesin Fellowship)'을 창설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했다고 지적합니다. Broadacre City 프로젝트는 그를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동시에 그를 미국 건축의 '군주'로 만들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군주'들이 자아의 껍질에 갇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때 건축 사무소가 지식 노동과 수작업을 구분짓는 엘리트의 거점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노동 착취의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비야케 잉겔스(Bjarke Ingels)는 렘 쿨하스(Rem Koolhaas)의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오랜 기간 ‘슬픔’을 견뎌야만 ‘계급 상승’을 할 수 있었고, ‘디자이너들을 계속해서 쿨한 무언가(cool stuff)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상황을 경험했다고 전합니다(Amaral, 2016).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크레이그 웹(좌)과 프랭크 게리(우)

프랭크 게리(Frank Gehry) 사무소에서 크레이그 웹(Craig Webb)이 하는 역할은 컴퓨터를 켜는 방법도 모르는 건축가(프랭크 게리)가 컴퓨터가 생성하는 건축의 '군주'가 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다른 건축가(웹)를 꼭두각시로 전락시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르크스(Marx)는 상품의 숭배가 실제 생산 과정을 이데올로기나 이미지로 숨기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경우, 위대한 건축가라는 신화가 집단 작업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건축에서 나르시시즘은 개인 건축가의 자아와 욕망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건축이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물리적으로 구현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군주적 개념과 나르시시즘은 건축 이론과 실천의 핵심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는 건축가의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권력 구조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건축에서 나르시시즘은 개인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욕망이 어떻게 건축물의 디자인과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며, 이는 건축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상상력, 그리고 사회적 반응이 얽힌 복합적인 창조적 과정임을 의미합니다.


스타일? 혹은 자기복제?

- 건축가의 역할과 건축형태의 나르시시즘

건축은 형태에 있어 단순히 개인의 자아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은 기념물, 공공 공간, 주택 등 다양한 형태로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이를 강제하는 수단이 되어 왔습니다. 건축물은 특정 방식으로 설계되어 사용되거나 인식되면, 해당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건축은 특정 주관성과 자아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며,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축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널리 퍼지면서, 건축 이론과 실천의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모순은 건축 분야에서 설계라는 “노동 현장’의 상황 뿐 아니라 디자인 차원에서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형태로 변형하는 과정에서도  '군주병' 또는 '프린스 컴플렉스'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건축은 종종 자신의 개념을 재현하려는 경향을 보이며, 이는 건축이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나르시시즘적 경향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건축은 사회적 영향을 넘어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스타키텍트(starchitect)'라는 용어로 불리는 스타 건축가들은 건축을 자율적 실천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하 하디드(Zaha Hadid)는 독재 정권을 위해 설계하면서 건축을 단순히 '디자인'으로 여겼고,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건축 요소를 가지고 놀며 역사와 사회적 맥락을 허구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콜하스는 상황을 묵인하고 기존 상태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 디스토피아를 침묵하는 유토피아로 발전시키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독재자의 아들이 의뢰한 바쿠 소재 자하 하디드의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AFP)
Absorbing Modernity 1914-2014는 국가의 건축 정체성이 현대성을 통해 어떻게 지워졌는지 보여줍니다. 이미지: 렘 콜하스
렘 콜하스 설계 중국 베이징 CCTV 빌딩

이러한 양상은 건축가 개인의 자아와 정체성을 재생산하고 인식시키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비록 일부 저자들이 건축 분야에 대한 비판적 지식을 생산했지만, 건축은 여전히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스타일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의 정체성과 디자인 철학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건축이 사회적 힘에 의해 형성되고, 동시에 이를 형성하는 역할을 조화시키는 데 직면한 도전 과제를 조명합니다.


건축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형성하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개인의 자아와 사회적 이데올로기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반영합니다. 건축물은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이를 내면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 건축가의 자아와 비전이 강화됩니다.

나르시시즘적 경향은 건축가가 자신의 개념과 스타일을 통해 사회적 맥락을 넘어서 개인적 자아를 재생산하려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태도는 종종 건축이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개인의 정체성과 철학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건축에서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개인의 자아 표현을 넘어서, 건축이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물리적으로 구현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이는 건축가가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건축물에 투영하면서도, 동시에 그 공간이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어떻게 조화롭게 수행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참고문헌]

정호정, 김지혜. (2016). 물질적 상상력에 기반한 맑은 물의 이미지 연구 -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중심으로 -. 한국도자학연구, 13(3), 179-194.

Amaral, C. (2016). Prince complex : narcissism and reproduction of the architectural mirror. This Thing Called Theory.

KATODRYTIS, G. THE AUTOPOIESIS AND MIMESIS OF ARCHITECTURE.


@alohafreed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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