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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난 Mar 17. 2024

현음 : 활이 활시위를 떠나며 내는 소리

 영화 '츠루네 극장판-시작의 한 발'을 보고

ㆍ해당 글은 '츠루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에 대한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ㆍ해당 글은 필자의 기억을 토대로 작성되어 실제와 다소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친구의 요청으로 궁도 애니메이션인 '츠루네 극장판- 시작의 한 발'을 보러 갔다.  츠루네의 첫 극장판은 1기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덕분에 본편을 보지 않고 갔던 나도 충분히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우연히 엄마가 젊을 적 궁도하는 사진을 본 주인공, 미나토는 궁도라는 스포츠를 궁금해하게 된다.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미나토의 모습에 그의 어머니는 미나토를 궁도장에 데려가고, 미나토는 생애 처음 궁도인이 쏘는 활을 보게 된다. 깔끔하게 정돈된 바닥을 사뿐히 오가는 발, 곧게 펴진 상체와 뻗어진 팔. 팽팽하게 당기어진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를 내고, 숨결마저 차분해진 때, 쏘아지는 단 한 발의 촉. 활시위를 떠나는 순간 응축된 소리가 터지며 공기를 메운다. 침묵 가운데 울려 퍼지는 진중 하면서도 가벼운, 청량한 파열음. 츠루네의 이름은 여기서 시작된다.

 

 츠루네-

 현음 : 활이 활시위를 떠나며 내는 소리


 그 정적이면서도 화려한 모습에 넋을 놓아버린 미나토는 곧 다짐한다, 궁도인이 되기로. 초등학생 무렵 마음을 굳힌 그는 궁도로 유명한 중학교에 입학해 실력을 쌓고 고등학교에서도 궁도부의 부원으로 활동한다. 츠루네의 주된 시점은 여기로, 궁도, 그중 단체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한다. 극장판은 주요한 대회에 진출하며 벌어지는 충돌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중 특히 슬럼프에 대한 부분을 논해보고 싶다. 미나토가 슬럼프에 빠졌을 적 계속해서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지도자이자 훌륭한 궁도인인 마사는 어릴 적부터 궁도에 몸 담아 왔다. 분명 재밌었기에 시작했던 궁도는 어느 순간 잘 해내야만 하는 '과업'으로 바뀌었고, "궁도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된다. 습관처럼, 정해진 길이 이것밖에 없는 것처럼 계속해 나가면서도, 심지어는 뛰어난 결과를 내면서도 마사는 이것이 진정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한다.

 

 슬럼프가 무서운 점이 그건 것 같다. 좋아한다고 줄곧 믿어왔던 것을, 당당히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 그 시작이 즐거움이 맞는지, 내가 이걸 정녕 사랑했던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 순간이 온다는 것. 오랜 기간, 큰 비중으로 사랑해 온 일에 회의를 느끼는 건, 때론 그것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모든 순간들이, 과거의 '나'가, 그로 인해 구성된 오늘의 '나'마저 부정되곤 한다는 것. '나'를 구성한 기반이 무너지는 순간, 더 이상 무엇도 사랑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곤 한다. 날 떠받치던 삶이란 기반이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으로 돌변한다.


 좋아했기에, 진심으로 노력했기에 올 수 있는 '슬럼프'라는 시기는 그렇기에 무서운 것이다.


 마사는 긴 고민 끝에 만 발의 활로 궁도인으로서의 삶에 진혼식을 올리기로 결심한다. 미나토를 처음 만나는 시점이 이때이다. 마지막 한 발을 앞두고 있던 마사. 마사의 활에 감명받은 미나토는 저도 모르게 달려가 마사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속사병-궁사들에게 종종 생기는 질병의 일종으로, 준비되기 전 활을 쏘아버리는 증상-을 앓고 있는 미나토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투영한 그는 마지막을 유예하기로 마음먹는다. 미나토의 학교에 감독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지도하며, 정말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가 이제껏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는 슬럼프를 극복한다. 지난한 슬럼프 후에 깨닫게 되는 가장 놀라운 점은, 그토록 힘들었던 순간들에서조차 그는 궁도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어느 순간 좋아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지쳐버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했기에 잘하고 싶고, 잘하고 싶기에 노력했던 그 모든 순간들에 최선을 다했기에. 나는 그래서 슬럼프라는 병이 슬프면서도 좋다. 애정에서 비롯되었기에 슬프고, 애정에서 비롯되었기에 기껍다.


 여느 스포츠물이 그렇듯, 츠루네는 궁도라는 하나의 스포츠로 모이는 마음을 다룬다. 잘 되지 않아도 계속하고 싶다는, 무언가를 꾸준히 사랑할 수 있는 재능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늘 함께해 온 동료들, 혹은 같이 싸웠던 상대와 함께 일구어가는 것이기에, 스포츠물은 아름답고 강렬하다. 괜히 무언가 하고 싶어지는 것은, 무언가에 온 마음을 쏟아붓고 싶은 것은 아마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지.


 예전에 친구가 "안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너무 크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한 적 있다. 그것도 누군가의 방식이겠으나 나는 조금 더 격정적인 삶이 좋은 것 같다. 기뻐할 수 있는 순간에 마음껏 즐거워하고, 또 괴로울 때는 실컷 슬퍼하며. 요동치는 순간들을 쌓다 보면 외레 안정적인 마음-굳건함-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츠루네의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는, 이러한 성장이 학생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함께한 선생님, 어른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마사는 미나토와의 첫 만남을 상기하며 '그때의 마지막 한 발이 사실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라고 언급한다. 누군가가 내게 큰 의미였던 순간이, 어쩌면 상대에게도 큰 의미였을 수 있다는 것. 성장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미치도록 좋았다.

 

 어쩌면 성장이라는 건, 어른이라 느낀 사람들이 실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마사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엄한 스승 아래 자랐기에 겪었던 설움과 인정욕구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어린 저의 학생들은 그런 감정을 모르고 자랄 수 있길 바란다. 자신의 스승과는 다른 스승이 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부분은, 긴급한 순간 가장 먼저 나오는 행동은 가장 자주 봐 온 것과 닮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미나토의 친구이자 자신의 제자인 세이야가 과거의 자신과 유사한 고민을 하는 것을 목격한 순간, 마사는 어릴 적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어렸을 적 들었던 속상했던 말과 날 아프게 했던 행동들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하지만, 정작 그 당시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어떤 말을, 또 어떤 행동을 바랐는지는 알 수 없어서, 자신이 겪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해버리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가 되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은 모두 '옳음'을 원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책이, 이야기가 좋다. 마음 깊숙이 바랐으나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지 못한 말을 발견하기도 하고,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상황들을 미리 예습함으로써 미래의 누군가가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도록 하니까. 무엇이 가장 울림 있는 말일지, 어떤 행위가 가장 간절한 것일지 함께 고민해 주니까.


 문득 얼마 전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이라는 카카오페이지 웹소설에서 읽었던 일화가 떠오른다. 주인공과 멤버들이 아이돌로서 활동하던 중, 멤버 중 하나인 김래빈의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는다. 가족들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제법 오래전이었으나 김래빈이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촬영이 모두 끝난 후라는 점이 밝혀지며 주인공, 박문대는 크게 분노한다. 어릴 적 학업에 집중하던 와중에 온 연락을 못 받아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이이기에 그는 더 불안해하며 김래빈이 할머니 곁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 다행히 할머니가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 그러나 다음 일정은 잡혀있다. 당장 큰 문제가 없는 할머니 곁에 남느라 일을 도외시하는 것은 프로의식의 결여가 아닐지, 그렇다고 일을 하러 떠나버렸다가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김래빈에게 박문대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누구나 살면서 그걸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는 뒤따라올 수 있다고. 그러나 자신은 그때 가족여행을 따라가지 않은 게, 학원에서 공부한다고 연락을 받지 못한 게, 그게 계속 가슴에 맺힌다고. 김래빈은 그런 경험을 하질 않길 바랐던 박문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츠루네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대회 당일, 감독인 마사가 교통사고로 대회 참석을 못하게 되는데 사고 소식만을 알 뿐 관계자들조차 부상의 경중을 모르는 상태였다. 연락이 끊긴 감독에 안절부절못하는 궁사들에게 관계자 중 한 명이 해당 소식을 전하게 된다.


 아마 박문대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관계자의 행동이 경솔했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학생들이 마사를 찾아줄 수 있는 것도,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당장 대회가 목전에 있는데 해당 사실을 굳이 알리는 것은 아이들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 이상의 무언가는 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리라.


 박문대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아이들이 동거동락하며 가르침을 준 마사의 부고를, 대회 후에 들었을 경우에 대해, 설령 죽음이 아니 더라 해도 마사의 사고를 이후에 듣고서 자책했을지도 모를 아이들을 생각했기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을 접할 수 있음은 감사한 일이다. 내 주위의 누군가에게, 혹은 나에게 닥칠 미래의 슬픔에 미리 대비함으로써 조금이라도 그 통증이 줄도록 할 수 있으니까.


 츠루네는 쿄애니 제작인 만큼 하나하나의 동작, 활이 쏘아지는 순간 주변의 고요함, 그와 대비되는 활촉의 매서움, 그 순간을 메우는 공기마저 아름답게 묘사한다. 미를 추구하거나, 궁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 혹은 오랜만에 가슴 뛰는 청년들의 성장 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츠루네에서 인상 깊었던 대사를 마지막으로 횡설수설한 감상을 끝마치고자 한다.


아름다운 것이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것은 대체로 아름답지.
-츠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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